그 많은 우연으로 우리가 만났다면, 우린 만날 수밖에 없는 필연이다. 숱한 우연이 쌓이면 필연이 된다. 알면 필연이요, 모르면 우연이라지만, 알고 모르고의 상황 모두 인연들이다. 겹치고 얽히고 중첩되면서 우리가 만난 것이다. 약간의 사소한 변수로도 우린 엇갈리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가 만나든 만나지 못하든 우리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있는 범위는 제한적이다. 만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만날 수 없기도 하다. 근원엔 태어남이 시작이므로.
태어남 자체가 우연이기도하고 필연이기도 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부모를 만나 태어나는 일 전체가 나와는 무관하다. 그냥 일어난 일이다. 그래서 왜 나를 나았냐고, 이런 집안인 줄 몰랐다며,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냐고, 이건 내가 원하는 세상이 아니라며 억울해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으랴. 어찌어찌하여 태어난 우리는 그럭저럭 성장을 하고 어느 날 이렇게 만나게 됐으니.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의 평가는 무의미하다. 다만 상황을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한다. 인간 세상에서의 나의 좌표를 알아내야 하기도 하겠지만, 이미 주어진 것들에 대한 좌절이나 자기 비하로는 얻을 게 없다. 내가 선택할 수도 없고 바꿀 수도 없다.
태어남처럼 죽음도 그러하겠다. 늙지 않으려, 죽지 않으려 하는 모습들에서 안타까움만 더해진다. 生과 死의 과정이 그러하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 있는 우리의 일상들도 그러하지 않을까. 날씨가 변하고, 계절이 바뀌고, 매일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나와는 무관하게 나타나고 사라진다.
내 의지와 욕망과는 다르게, 잡고 싶어도 갈 것은 가고, 있던 것은 없어지고, 세월은 그렇게 흘러간다. 날씨조차 예측이 큰 의미 없이 수시로 바뀌고 변화무상이다. 가능성이 희박한 일의 성취가 부럽기도 하지만, 계획을 세워 인생 일대 목표를 향해 일상을 채워가는 모습이 일면 대단해 보이기도 하지만, 자칫 억척스러움이 억지스러워 보이고, 주변의 희생을 감수할 가치에 회의가 들기도 하고, 성공 보장의 허울이 벗겨진 좌절의 이면이 보이기도 한다.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용해서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에 손을 들어 저항을 멈춘다. 밥 먹고 잘 자고 숨 쉬고 활동하는 자유에 감사한다. 할 수 있는 일 중에 하고 싶은 부분을 해나가며 별 일 없이 살아간다. 심심하고 아무 일 없는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