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겨 심은 작물이 땅에 정착하여 살아내는 것
직접 파종하는 일이 드물다. 미리 씨앗을 뿌리고, 날씨의 온도가 맞고, 때맞춰 비를 얻어 적당한 시기에 발아를 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종에 따라 다르겠지만, 모종을 사서 옮겨 심는 게 일반이다. 처음엔 씨앗을 슥슥 흩으며 이렇게 뿌려두면 곡식들은 다 자기 알아서 싹이 나고 잘 큰다고 말하던 엄마도 세상이 예전 같지 않다며 낮은 발아율을 보면서 그냥 종묘상으로 발을 옮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밭에 혹 한 주라도 건너뛰면 소중한 물건 잃은 사람처럼 실망하고 또 언제 가려나 기다린다. 한번 쉬면 보름의 시간이 지나간다. 직접 갈 만한 거리도 아니고, 버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관절통이 허락하는 것도 아니어서 나의 일정을 맞출 수밖에 없음을 답답해하는 경우가 벌어진다.
살음하면 뜸해도 된다.
살음한다는 말을 몰랐다. 사랑? 사랑하면 뜸해도 된다고? 평소 사랑이란 말을 쓰지도 않으면서 무슨 사랑이냐고 하니, 살음만 하면 그때부턴 자주 안 가도 큰 탈없이 거의 괜찮다는 말만 한다. 살음만 하면.
커피 찌꺼기를 모으던 엄마는 최근 찌꺼기를 줍지 못한다. 동네 사람들 수다 중에 어떤 말이 퍼졌다. 커피 찌꺼기를 밭에 뿌렸더니 벌레도 안 들고 수확량도 늘었단다. 간간이 몇 봉지씩 유아차에 실어 모아놓고 주말에 밭에 실어가던 엄마는 소문 이후에 찌꺼기 구하기 힘들어졌다고, 커피숍에서 찌꺼기를 내놓기가 바쁘게 사라진다고.
운동 겸 찌꺼기 실을 겸 아침을 나서던 엄마는 경쟁이 심해지고 며칠 빈수레만 끌고 오면서부터 활동시간을 새벽으로 당겼다.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무리하지 말라고 해도 엄마는 그냥 운동삼아 동네 한 바퀴 돌다 온다고 말하지만 의도가 짙다. 뭔가가 어디에 좋다는 소문의 힘은 세다. 그것도 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새벽잠 없는 노인네들에겐 귀에 쏙 맞는다. 특히나 몸에 좋은 거라는 말이 떠돌면 그 물건은 씨가 마를 정도니.
커피 찌꺼기가 작물에 좋은지,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몰라도 봄철 내내 찌꺼기 경쟁은 끝이 없었다. 야간이고 새벽이고 유아차 끌고 돌아다니면서 제법 많은 양의 커피를 모은 날이었다. 가끔 밤에 잠도 안 들고 한번 깨면 다시 잠들기도 힘들고 해서 혹시 늦게 문 닫는 커피숍이 있기도 해서 밤에도 한 번 나가본단다. 말만 그렇게 하는 줄 안다. 밤엔 위험하다고 조심하라고 해도 노인의 갈증이 밤잠을 미룬다.
올봄에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 자랑하던 엄마가 나와 같이 가기 위해 커피 찌꺼기를 미리 밖에 내놓고 집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내 도착을 알리고 엄마가 내려오니 큰 비닐에 담긴 찌꺼기가 그 보물이 통째로 없어졌다.
아까 분명 내놨는데 없네? 어디 갔지? 설마? 그럴 리가?
하얗게 질린 엄마 얼굴은 순간 얼이 빠져 허둥댄다. 너 도착하기 1시간 전에 내려다 놨는데, 양이 많아 한꺼번에 옮기기 힘들까 봐 미리 내다 놨는데.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빠지고, 가슴이 두근대고, 당황한 기색은 계속 눈동자를 두리번거리게 한다. 엄마, 없어졌으면 누가 가져갔는가 보다 하고 가요. 원래 엄마 것도 아니었으니 더 필요한 누군가 가져갔겠지 생각하고 빨리 밭에 가자고 해도 엄마는 고개를 돌린다. 연신 놔둔 자리를 살핀다.
나중 아파트 관리실을 통해 시시티브이를 확인해 보고, 동네 사람들에게 수소문하고, 그 시간대에 움직일만한 사람들을 쫓아도 분실물 행방은 찾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모았는지 너는 모른다며, 어떻게 없던 걸로 하냐며, 가져간 놈을 꼭 찾고 싶다고 했지만,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다. 다행히 그런 감정은 땀 흘리는 노동에 흐트러진다.
그렇게 황당한 마음에 분해하던 엄마는 밭에서 호미를 들고 작물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금세 잊는다. 이제 살음했는가 보네. 제법 자란 놈도 있고. 좋다. 그런데 잡초는 손을 안대도, 영양을 안 줘도 어찌 저리 잘 자라는지 혼자 중얼거리며 연신 땅을 훑는다.
재촉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매일 밭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이제 그만하고 가자. 벌써? 다음 주에 또 오자. 그래 내가 네 시간을 너무 뺐았나? 겨우 손을 비우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 한다. 다음 주 올 때까지 엄마는 이번엔 뭘 심을지, 커피 찌꺼기를 모으러 몇 시에 갈지, 마늘 캘 때가 다가오는데 거기엔 깨를 심을지 등등으로 바쁘다.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까지 엄마는 고개를 돌려 누군가에게 얘기를 건다.
잘 커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