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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Jun 17. 2022

한없이 함 없는 5

자기가 하는 말을 들으며 말하라

책을 받아 두꺼운 표지를 넘기니 거기엔 흑백 영사진이 한 장 끼워져 있었다. 꼬부랑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움켜쥐고 연한 미소를 지은 얼굴에 입을 다문 마른 얼굴. 백발조차 드물어도 잘 빗어 넘,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맑은 모습. 형형한 눈빛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하듯 뚫어보고 있어 꼭 내 마음이 그대로 읽히고 있는 느낌이었다. 분이 선생님이시다.


처음 강의하실 때의 빠르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는 조금씩 속도 조절하듯 느리게 강의하셨지. 서둘러 많은 걸 가르쳐주려다 보니 목소리가 빨라졌고,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나면 한 참을 지친다고. 렇게 몇 해를 보내곤 이러면 오래 하기 힘들겠다고 생각이 드셨다고.

그 후로 선생님의 말씀은 느려진  대신 뚜렷한 음성이었다. 정신을 차려 말을 하려면, 스스로가 하는 말을 본인의 귀로 들으며 말해보래이. 머릿속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해서, 본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말을 하면 조리도 서고 말에 힘이 실린다고.


1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이들이 배움을 거쳐갔고, 의미 있는 학회로까지 성장했다. 이제 웬만큼 자랐고, 선생님도 할 만큼은 하신 듯 말이 없으시다. 지속되는 공부 모임에서 책은 벌써 몇 바퀴를 돌았다. "그래, 오늘은 뭘 가져왔는지 다들 함 풀어보시게."

순간 모인 학생 중 어느 누구도 입을 떼지 않고 침묵이 흐른다. 무언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적막의 무게가 감당이 안될 정도다. 선생님과 같이 한 10년의 세월은 마치 10분도 안되게 느껴진 반면, 지금의 이 10여 분의 시간은 10년 같이 무겁다.


"그럼 내 한 가지 말하마."

 고요를 깨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고개 숙이고 있던 학생들은 서로 눈치 보며 선생님을 바라본다.

"내, 나이 들어보니, 늙으면 힘이 없다는 게 맞아. 그렇게 힘은 예전 같지 않지만, 아무 아픈 데는 없어. 나이 드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병은 피할 수 있거든. 너희들은 여기에 더해 如如하길 바란다."


90을 넘긴 선생님은 이제 그칠 때가 됐다고 하면서 다들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신다. 옆에 50쯤 된 어느 여학생이 눈물을 흘리자 선생님은 내 금방은 안 간다며 타이르신다.


이쯤. 선생님은 연세도 연세지만, 마지막 염두에 두신 바람이 하나 있었다. 차마 모두 모인 자리에서 언급하기 뭣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나중 무달형님 혼자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였다. 선생님은 "내가 조금만 더 밀어주어 道門을 열 것 같은 놈이 있으면 그래도 몇 년을 더 버티겠구먼 참, 허허" 거의 혼잣말 같은 선생님의 독백을 듣고, 무달형님은 선생님께 절을 하고 나오는 길에 많이 울었다고. 부족해서. 아쉬워서. 답답해서. 고마워서.


마지막 유언은 '내 흔적 남기지 마라'였고, 그 유훈에 따라 화장 후 아무런 표지석도 없이 스승님 묘소 가는 산길 곁에 칡덩굴의 갈화 꽃향이 흐드러진 곳에 흩뿌려졌다. 유족은 '아버지가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신 건 여러분 덕분입니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무달형님은 한참만에 감았던 눈을 뜨면서 말한다.

담벗, 우리 끝까지 열심히 달려가세. 부탁이니 그 끝에서 그 벼랑 끝에서 힘차게 나를 밀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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