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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월 Oct 10. 2022

소나기는 태풍으로

어찌 그대로만 받아들일 수 있나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황순원의 소나기 작품은 한창 예민한 사춘기의 우리 마음을 뭔가 애틋하게 흔들었다. 교과서에 실린 글들이 대부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글이거나 정의와 충효 등의 애국심 같은 재미없는 얘기들이었기에 그런 내용에 식상했던 우리에게 소나기는 가히 부럽고 야릇하고 아름다운 단편이었다. 도덕적 윤리적 가치관을 강조하는 수업은 10대의 혈기왕성한 중학생들에겐 그저 학교 성적을 위한 겉도는 과정일 뿐이었다. 욕망의 절제와 인내심, 참을성을 배양시키려는 그때의 국가 교육관은 제 5 공화국 독재자의 복종 요구와 권력 유지용처럼 강압적이었고, 교내 선생님들도 그 취지를 따를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소나기를 읽은 우리는 소나기를 순수하고 달콤한 솜사탕 같은 얘기로만 끝낼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고 하면서 플라토닉 러브 같은 정신적인 사랑만 인정하기엔 육체가 너무 뜨거웠다. 드디어 소나기는 각색을 통해 태풍이라는 이름으로 재편집된 단편 소설이 탄생했다. 만난 남녀가 서로의 육체를 훔쳐보다 촉각으로 그 느낌을 전달하면서 야한 애정행각을 벌이는 3류 소설이 누군가의 필사로 돌기 시작했다. 아쉬운 희망이 막연한 상상을 넘어 손에 잡힐듯한 표현들로 재탄생한 것이다. 누가 태풍을 썼는지는 중요하지도 않았고, 다만 꽤 많은 애정소설을 읽은 누군가에 의해 쓰인 소나기 후속 편은 독자들의 더 리얼하고 자극적인 내용을 요구했고, 태풍은 곧 결정판이 나돌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읽히던 태풍은 점점 거세게 불어 이제 우리 반을 넘어 다른 반 친구들에게 건네 졌고, 곧 학년 전체의 거대한 공감을 일으켰다. 짧은 소설이 그 수위가 높다곤 하지만 그건 겨우 중학생의 일탈적 상상 정도의 창작 수준이라 한계가 있었다. 급기야는 참다못한 누군가가 소설의 원본 마지막 페이지에 삽화를 그려 넣고야 만다. 학교에서 그런 그림을 그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고, 아마도 집으로 가져가 소설을 읽은 누군가가 그렸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급조된 삽화는 조잡했고, 터미널 공공화장실에서나 봄 직한 정도의 그림이었다.


처음엔 몰래 읽히던 태풍은 이젠 수업시간에도 친구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 졌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공부하는 척하면서 적당히 태풍을 읽었고, 쉬는 시간이 아닌 수업시간의 태풍 이동은 당연히 용의주도함이 필요했다. 허나 언제나 그렇듯이 그 중요한 때에 꼭 실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본인의 순서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한시라도 빨리 건네받으려 했고, 읽고 있는 학생은 조금이라도 더 자기 수중에 머물길 원했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열심인 어떤 학생을  한눈에 알아봤고, 거리가 멀었음에도 마지막 삽화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는 증거가 되어버렸다. 그렇게 태풍은 학생들의 손아귀를 벗어나게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을 하다 말고 압수물을 가져갔고, 읽다 걸린 학생은 채 읽지 못한 친구들의 눈 할큄을 받아야 했다. 교무 회의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사태는 압수로 끝나지 않았다. 창작자 색출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처음부터 싹을 꺾으려는 교무주임 선생님의 지시였을까?


학교에서 규율을 담당하는 한문 선생님이 우리 반 교단에 올라 모두를 주목하게 했다. 학생들의 증언들을 바탕으로 우리 반이 태풍의 핵으로 지목되었고, 선생님 손에는 예의 그 마지막 삽화그림이 들려있었다. "이거 누가 그렸어?" 고압적인 목소리에 우린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 말도 없었다. 태풍을 보지 않은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기에 불똥이 어디로든 튈 것이고, 부디 그 불똥이 약하거나 아무 일 없길 제발 바랬다. 다만 처음 우리가 태풍을 볼 당시엔 그 삽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 반 친구의 작품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삽화를 그린 당사자를 찾고 나면 이후엔 소설을 쓴 이를 색출하려 할 것이기에 우리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한 손엔 삽화를, 다른 손엔 몽둥이를 들고 계신 선생님 앞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학생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구타가 일상으로 벌어지는 때였으니. 그리고 선생님은 우리들 중 몇을 지목한다. 평소에 태도가 나쁘다고 소문난 몇몇은 억울한 표정이다. 교단 앞으로 학생들 몇이 서있다. 그리고 한 명씩 지명하며 묻는다.

"이거 네가 그렸어?"

"전 아닙니다."

"그럼, 네가 그렸냐?"

"저도 아닙니다."

"어쭈. 다 그리지 않았다고 말하네. 그럼, 네가 그렸겠구나. 너 그림 좀 그리잖아."

선생님이 지목한 학생은 나름 사생대회에서 상을 탄 적이 있는 친구였다. 범인을 찾았다는 기쁨인지 선생님 손에 쥐어진 몽둥이에 힘이 들어갔다. 야 이제 죽었구나 하는 숨죽임이 공간을 팽팽하게 꽉 채운 순간.

".... 제가 그리면 이것보다 더 잘 그립니다."

헉하고 히죽거리다 갑자기 우리는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우와하 하고 웃었고, 책상을 두드렸다. 근엄하던 선생님도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하고 웃어버렸다. 게임은 끝났다. 그렇게 웃어놓고 뭘 더 진행한단 말인가. 그렇게 우리들의 소나기는 태풍이 되어 지나갔다. 사랑이 아닌 추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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