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볕에 녹아 사라진 눈(손님)

#삶에 들어왔다 스쳐가는 것들에 대하여

by 세시반

손님


생기 없는

메마른 나뭇가지에

층층이 눈이 앉아

하늘까지 하얗다


저보다 가볍기도

저보다 무겁기도 한

얇은 눈벽이 설레어

버텨본다


바람결에

슬렁 흔들리고

동동 흔들리고


시린 뼈 마디를 감싸는

재생된 피부처럼

생기를 갖추고

조용히 무게를 견딘다


온다 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내려앉은들 피하지 않으며

이미 쌓였으니 털어내지 않으며

그저 바람의 리듬을 탈뿐


오후의 볕에 서서히 녹아 사라지고

다시 메마른 가지가 되어도

아쉬워하지 않으며


축축 흔들리고

툭툭 흔들린다




새벽녘 방문을 열고 나오니 창밖 나뭇가지에 눈이 내려앉았다. 불을 켜지 않았는데 온 세상이 하얗다. 저층이라 나무뷰가 좋으니 종종 뜻밖의 계절의 반가움이 있다. 오후의 볕이 유난히 밝더라니 어느새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모두 녹았다. 아름다움은 왜 이리 짧은 건지. 너무 짧은 방문이었다. 반갑자마자 순식간에 가버린 손님. 아쉬운 건 나무가 아니라 나일지도. 조금 더 간직하고, 조금 더 바라보고 싶고, 조금 더 나누고 싶었는데 자연의 섭리가 야속하다. 사진이라도 찍어둘걸.


잠깐이지만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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