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어린이집에서 쓴 맛을 본터라 스위스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다는 통지서(만 4살 이후 유치원부터 의무교육이다)가 집에 날라 왔을 때 보내지 말고 집에 데리고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민하는 내용을 스위스에 있는 한국 교회에서 만난 집사님들께 말씀드렸더니 스위스 유치원이 생각보다 괜찮다며 그만 움츠러들고 보내라고 하신다.
고민 끝에 보내기로 했다. 처음 가는 유치원이라 독일어 못한다고 아이들이 괴롭힐까 걱정했었는데 유치원에 갔다 온 첫째가 말했다. “엄마! 나 말고도 독일어 못하는 애들이 많아. 그리고 독일어 못하는 아이들끼리 독일어 수업도 따로 들어."
첫째의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이민을 많이 받고 있는 스위스이기에 아이가 가는 유치원에서 절반 정도는 아니지만 삼분의 일 정도는 독일어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안도감에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심심하게 엄마랑 지내던 첫째는 유치원이 좋다고 했다. 그림도 실컷 그리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즐겁다고 해서 어린이집에서 고통을 겪은 후라 기쁨이 두 배가 되었다.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오고 그리고 유치원 근처 놀이터에서 2~3시간 놀다가 들어왔다. 아기가 뱃속에 있는 때는 이 생활도 괜찮았는데 둘째가 태어나니 유치원 끝나고 놀이터에 가서 첫째 돌보랴 둘째 아기 돌보랴 육아 전쟁이었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둘째를 며칠 안고 다녔더니 팔이 빠질 듯 아파왔다. 그래서 둘째 아기부터 여러 기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아기 흔들 침대부터 시작해서 퀴니 유모차까지 샀다. 신생아용 침대 같은 유모차에 비닐 커버까지 사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유모차에 태우고 다녔다.
유치원 공개 수업에도 유모차에 태워 갔었다. 둘째 아기 챙기느라 조금 늦게 갔더니 이탈리아 아이 에어클디뎃이 우는 첫째를 괜찮다며 달래주고 있었다. 엄마가 오니 활짝 웃어 보인다.
엄마들이 오고 선생님이 아이들을 불러 모으신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노래도 부르고 숫자도 세고 그러고 나서 각자 놀이 활동에 들어간다. 스위스 유치원 교육은 철저하게 놀이 위주의 교육이다. 유치원 환경도 아이들이 주로 갖고 노는 소꿉놀이뿐만 아니라 인형까지 다양한 놀이와 미술도구가 갖추어져 있고 바깥에는 모래 놀이부터 공터와 놀이터까지 바깥 놀이하기 좋게 구성되어 있었다. '친구들과 무엇을 하고 놀까' 혹은 '무슨 그림을 그리고 만들까'가 중요한 프로그램이었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며 소리치는 악몽을 꾸는 첫째를 생각하며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물건에 독일어 낱말 카드를 붙이고 독일어로 첫째와 대화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국어로 된 가정통신문이 날아왔다. 내 눈을 의심했다. 정말로 스위스 유치원에서 보낸 한국어 가정통신문이었다.
글을 읽던 중에 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던 것은 이 대목이었다.
"집에서는 모국어로만 쓸 것
(독일어와 섞어 쓰지 말 것)"
아이의 언어교육에 관한 가정통신문이었는데 거기에선 엄마를 딱 찔렀을 때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그 말로 모국어인 바로 그 말로 아이를 집에서 사용하게 하라는 것이었다. 나에게 너무나 충격이었다.
아! 이 나라에서는 모국어의 깊이만큼 모국어로 머릿속에 프로그램이 형성된 딱 그만큼 외국어가 자란다는 학술적인 언어 교육학의 기초 위에 모든 제도가 뿌리내려 있었다.
한국은 어찌 보면 섬나라와 같다. 섬처럼 다른 나라 말과 말끼리 섞일 위험이 적다. 왜냐하면 이곳은 거의 대부분 한국어를 하는 사람들만 사니까 그러나 스위스는 나라 간 이동이 쉽고 여러 언어가 공존하다 보니 아이들 언어 교육에 관심이 많은 나라 중 하나이다.
한 가지 예로 유치원 친구 중에 메리는 엄마 아빠는 크로아티아인이고 부부가 젊어서는 아기를 데리고 일을 하기 위해 영국에 살았다. 이때 보모는 영국 사람을 구해 메리는 영어를 잘했다. 그러나 엄마 아빠의 모국어인 크로아티아어를 거의 할 줄 몰랐고 이제는 스위스에 살게 되어 독일어를 배우게 되었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여러 나라 언어를 접했지만 정작 모국어를 잘 모를 메리와 같은 아이들은 언어 정체성의 혼란이 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하지 않아 사람들이 심각성을 잘 못 느끼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는 아이들이 자신의 언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이 모국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가정통신문을 통해 도우려고 했던 것이다. 즉 모국어의 커다란 뼈대 위에 외국어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다는 것이 놀랍다.
한국의 그 많은 영어 유치원이며 영유아 영어 교육 시설들을 스위스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할까?
대학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교수들의 연구와 실제 현장에서 이뤄지는 교사들의 활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학부모에게까지 공지해 준다는 것인 놀라운 스위스라는 사회를 대신 말해 주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