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망록] 박기순의 오빠, 민청학련·5.18·노무현·윤석열에 얽힌 풍운아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박기순의 둘째 오빠, 노무현·윤석열 전 대통령과도 관계가 있었고 노무현 당선의 숨은 공로자였던 사람. 고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이다. 고인은 지난 20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누이인 박기순은 1978년 크리스마스를 넘긴 12월 26일 떠났는데 그는 2022년 크리스마스를 넘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가 떠나기 전에 그를 인터뷰해 삶의 이야기를 기록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그에게 40년 덜 산 어린 후배로서 선배님이 돌아가신 후에 선배님 이야기를 글로 쓰고 싶다고 하자,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그날 이후엔 마음대로 하라"고 하셨다.
박형선은 지난 1970년대 전남대학교 학생운동의 주역이었다. 당시 전남대 학생운동은 서클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특히 전남대 71학번들이 주도한 '민족사연구회' 활동이 주요했다. 민사련을 주도한 건 윤한봉, 박형선 등이었다. 이들은 각종 시위를 주도했고, 전남대 농대 학생회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박형선은 1951년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둘째 형은 일본으로 징용을 갔으나 할아버지가 사망했다는 거짓 전보를 받고 돌아온 후 만주로 피신했다가 걸어서 보성까지 돌아온 바 있었다. 7남매였다. 그런데 박형선은 시골마을 출신이었음에도 광주의 명문인 서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어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이후 광주일고에 진학한다. 당시 서중-일고는 호남의 명문 코스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사건이 하나 터진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일진에 해당하는 이들과 붙었다. 동급생 친구가 등에 잉크를 뿌렸다. 그는 진클럽이라는 폭력서클 소속이었다. 당시 일고에는 들장미와 진클럽이라는 서클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교복이 단벌인 학생들도 많았던 시절인데 잉크가 잘 안 지워질 거라는 사실에 화가 났다. 그래서 바로 달려 들어서 그 동급생을 두들겨 팼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짙던 시절이었다.
잠시 뒤 일진 무리가 와서 유리창을 열고 강당 뒤로 나오라고 했다. 직후 그 무리에게 폭행을 당했으나 그러면서도 지지 않았다. 되려 "좋다. 내가 너희 서클 들어갈 테니까 (나한테 잉크 뿌린) 저 놈하고 싸움 한 번 붙여 주라. 분이 안 풀린다"고 말했다. 역시나 다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짙던 시절이라 그런지 심판을 두고 그놈과 붙었다. 서중, 일고 라인이라 서로 알기도 했고 운동선수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놈과 붙어 그야말로 무지하게 패버렸다. 이후 박형선은 한동안 서클에서 활동했다. 공부는 뒷전이 됐다. 그래서 대학 진학에 실패했다.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아버지 일 도우며 공부해서 다시금 전남대 법대에 지원했으나 또 떨어졌고, 이후 71학번으로 전남대 농대 축산과에 입학한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학 입학 직후 사회과학 공부를 했다. 그러나 입학의 기쁨도 잠시, 박형선은 1971년 대학 입학 직후 교련 반대 시위에 참여해 무기정학을 당한다. 다행히 이듬해 다시 학교에 갈 수 있게 돼서 1972년도 대학 1학년생으로 보냈다. 당시 전남대에는 광주일고 출신 전남대 71학번들이 만든 민족사연구회가 있었다. 이 동아리는 전남대의 첫 사회과학 서클이라고 한다. 초기 멤버로는 정상용, 이양현, 조천중, 문덕희, 김정길 등이 있었고 이후 이강, 김남주, 윤한봉 등도 합류했다. 이 과정에서 전남대 측이 서클 이름이 불온하다고 해서 할 수 없이 교양독서회로 그 이름을 변경하기도 했다.
박형선은 1972년과 1973년에 진행된 전남대 시국 시위 등에 관여하고 학생회 선거에도 힘을 썼다. 당시는 학교 선거에 시내(충장로) 조폭들도 개입하던 시절이었다. 납치 사건도 있었고 학생회 이권이 많았다. 그 시절은 라면이나 막걸리 값도 없어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박형선에게는 광주일고 출신이라는 이점이 있었다. 당시는 일고 진클럽이나 들장미 출신들이 시내를 장악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박동욱이나 김상중 등 이름 있는 조폭 중엔 일고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이 학생회 선거에 개입하려고 하자 찾아가서 "못된 짓거리 하려고 왔느냐"고 만류해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1973년엔 5.18 마지막 수배자로 알려진 합수 윤한봉과 함께 큰 데모를 하나 준비한다. 그런데 함께 준비하던 고재득(훗날 성동구청장을 지낸다)이 윤한봉과 박형선을 돕겠다는 취지로 학교 측에 이 사실을 알린다. 당시는 반공 정서가 강하던 시절이라 일반 대학생이 그렇게까지 반사회적이기 어려웠고, 고심 끝에 더 큰일이 일어나기 전에 정리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행보를 파악한 학교 측은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린다. 신고를 접수한 경찰은 박형선을 구례 화엄사, 윤한봉은 순천 송광사로 데려가 잠시 그곳에 머무르게 한다. 박정희에 반대하는 전국 대학생들의 시위가 전남대에서도 일어나면 자신들이 난처한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조선시대는 아니지만 유배 아닌 유배형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그리 긴 유배는 아니었다.
박형선과 윤한봉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된다. 당시 전남대 활동가들의 민청학련 사건 연루에는 특이점이 있었다. 타지역 활동가들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검거돼 조직이 노출됐는데 이 때문에 대부분의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시위 한 번 못 하고 검거됐다. 광주는 상황이 달랐다. 광주 활동가들은 타지역 활동가들의 검거 소식을 듣고 시위를 준비했다. 1974년 4월 3일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4호를 발표했다. 당시 발표에는 4월 8일까지 자수하면 선처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남대 활동가들은 자수하지 않았다. 대신 4월 9일에 전남대에서 시위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골방에 모여, 눈물을 흘리며 결정한 사안이다. 박정희 정권은 문덕희, 이학영(현 국회부의장) 등을 체포했고, 광주 활동가들에 대한 수사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4월 9일, 이들은 사직공원 팔각정에서 만나 계림동에서 전남대로 향하는 스쿨버스(황금마차)에 탔다. 버스가 전남대에 들어가는 길목인 옛 서방삼거리(현 서방시장)에 정차하자 박형선은 뒤차로 옮겨 탔다. 뒤차에도 다른 활동가들이 있었으나 "뒤차 유인물 안 나눠 줬더라고" 그래서 박형선이 유인물을 돌렸다. 그러자 버스기사가 차를 세우고 운전을 거부했다. 박형선은 유인물을 들고 학교로 뛰기 시작했다. 박형선은 농대로 달려가 구호를 외치고 유인물을 배포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학생들에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던 윤한봉은 점잖게 걸어왔다고 한다.
박형선은 농대 강의실을 전부 돈 후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던 온실에 들어갔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 보면 대체 왜 막다른 골목 같은 그곳에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직후 정보과 형사들이 들어와서 박형선을 체포했고, 윤한봉도 곧 뒤에 서게 됐다.
"눈물이 나더라니까. 못 해브니까. 분하고. 긍게 나는 자세가 흐트러졌어. (그러자 내 뒤에서 연행돼 오던) 합수가 똑바로 걸어 뭘 잘못했다고 그래 다리 풀렸어? 하더라고"
이후 자연스럽게 경찰관들에게 폭행을 당한 후 당시의 전남도경 대공분실이 위치하던 현재의 5.18민주광장 종각 자리로 끌려 왔고 직후 남대문경찰서로 압송됐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은 재판에 넘겨졌다. 박형선은 1심에서 징역 12년을, 항소심에선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4월 3일을 기해 폭동을 일으켜 국가 주요 기관을 점거하고 정권을 인수하려 했다"고 발표했음에도, 민청학련 관계자 대부분을 체포 후 1년 뒤쯤에 해당하는 1975년 형집행정지로 석방했다. 박형선은 이듬해 2월에 순천교도소에서 석방됐다.
광주의 민청학련 관계자들은 석방 직후 윤한봉 주도로 '전남구속자협의회'를 결성했다. 이는 광주의 각 부문별 대표자들을 총망라한 빅텐트 단체였다. 윤한봉이 협의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박형선이 2대 회장을 맡았다.
1976년 11월, 가톨릭농민회가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보상대책위를 구성했다. 당시 이 사건 해결을 뒷바라지했던 이들이 있다. 바로 윤한봉, 박형선, 이강과 같은 광주 활동가들이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함평 고구마 사건은 상당한 역사적 의미를 남기고 해결에 이르렀다.
그즈음 박형선은 보성건설(현 한양건설)을 창업한다. 척추와 허리가 좋지 않아 두 번의 수술을 하는 과정에서 돈을 만들어야겠다고 절감해 창업에 이르렀다. 보성건설에는 최권행, 정상용, 이양현 등이 함께 했다. 5.18 당시 도청항쟁지도부 부위원장이었던 정상용은 보성건설 영업부장직도 겸직하고 있었다. 보성건설 사무실은 5.18 당시 회의실로도 활용되는데, 창고에 무기를 쌓아두고 두 차례 회의를 진행했다.
1976년에는 박형선의 여동생인 박기순이 전남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박기순은 자신의 오빠가 박형선이라는 사실을 주변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를 의아하게 여긴 이강(농민운동가)이 그 이유를 묻자, 박기순은 "어떤 일이든 스스로의 힘으로 해야지, 누군가의 동생이라는 걸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
박기순은 늘 군복 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입었고 그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외형적인 치장에 집중하는 것은 현실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전형"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전남대에서 잘린 후 광주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가 되어 노동운동에 헌신했고, '들불야학' 창립을 주도했다.
들불야학 동지들과 땔감을 찾으며 크리스마스를 보낸 다음날인 1978년 12월 26일, 박기순은 불의의 연탄가스 누출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5.18 직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박기순과 함께 들불야학에서 활동했던 윤상원이 전남도청에서 죽자, 두 사람을 기리는 의미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했다. 현재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들불야학 일곱 열사를 기리고 있다.
1980년 5월 17일 밤, 박형선은 계엄사에 의해 예비검속돼 체포된다. 목포에서 올라와 자고 있는데 계엄사, 경찰 정보부 등에서 사람 3명을 보내왔다. 3인 1조였다. 당시 박형선은 사업가 신분이었고, 윤한봉의 동생 윤경자와 결혼한 상황이었다. 목포에서 목포시장, 신안군 부군수 등과 술자리를 가진 직후였기 때문에 5월 16일까지 진행된 민족민주화성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이를 진술하자, 합수부 관계자가 목포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형선이랑 술자리를 가진 게 사실이냐?"
"예. 맞습니다."
"알았어. 들어가."
당시 박형선은 이 대화를 듣고 합수부의 권력을 실감했다고 한다. 직후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확인된 박형선은 그의 문서에 빨간 도장으로 '훈방'이 찍히기까지 했으나 광주 상황이 악화됨에 따라 훈방되지 않고 상무대 영창으로 이송된 후 두 달간 고생한다. 윤한봉이 검거되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고 한다. 상무대 영창에서는 영창을 지키던 헌병 중사와 시비가 붙었다. 그 중사는 구속자들을 '폭도'라고 부르며 폭행했다. 이때 박형선은 중사에게 맞으면서도 "너 나중에 밖에서 만나면 두고 보자(..)"고 말했고, 석방된 후 정말 기적 같이 광주시내에서 해당 군인을 만났다. 그 군인은 동료와 함께 있었다.
박형선은 함께 있던 문덕희에게 "빨리 전화해서 사람들 부르라"고 했고 그날 그 중사를 죽도록 때렸다. 만류하던 일부 시민들조차 "이 인간이 5.18 때 광주시민들 괴롭혔다"는 박형선의 말을 듣고 함께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그 중사를) 무지무지하게 뚜드려 패브러. 사람들 난리가 났지. 길거리에서 젊은 놈들이 느닷없이 헌병을 패니까. 그래서 내가 악을 썼지. 이 개새끼 상무대에서 광주시민들 다 죽이려 한 놈이라고 이 개새끼 죽여 브라야 된다고 이것도 봐준 거라고 했지. 시민들이 에이 시원하다 하더라고."
민청학련과 5.18에 연루돼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박형선은 직후에도 사업에 몰두했다. 합수 윤한봉의 미국 밀항도 배후에서 지원했다. 5.18 당시 광주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가였던 윤한봉은 군부에 의해 검거되지 않고 미국으로 밀항했다. 이는 1년 뒤, 전두환 정권에 의해 발각되었다. 박형선은 또다시 대공분실로 끌려간다.
박형선은 윤한봉이 미국에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하던 1989년에도 안기부에 끌려간다. 임수경 방북사건 관련이었다. 이때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다. 경찰이 문을 두드리자, 박형선은 집에 있는 모든 현금을 주머니에 넣었다. 800만 원 정도였다. 남산에 가면 군복으로 갈아입게 한다. 이때 군인들은 박형선이 가진 돈을 확인하고 놀란다.
"야, 너 돈이 왜 이렇게 많아?"
"아니 그믄 장사하는 사람이 이 정도 돈도 없소?"
수사 과정에서는 재산에 대한 조사도 이뤄진다. 1989년 당시 박형선은 50만 평가량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주암댐 옆 21만 평 등을 보유했으나, 가치가 높진 않았고 평당 몇 백 원에 불과한 땅이었다. 그러나, 서울 사는 수사관들의 경제 감각은 달랐다. 이들은 그래도 평당 수만 원은 할 것이라 생각해 박형선을 큰 부자로 생각했다. 50만 평이면, 평당 만 원만 되어도 50억 원이 아닌가.
이후 수사관들은 박형선을 대하는 태도를 바꿨다. 심지어 "어떻게 그렇게 돈을 많이 모았소?"라고 대놓고 물어보기도 했다. 땅이 10만 원짜리도 있고, 1만 원짜리도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였다. 박형선의 말에 의하면 "당시 그 이야기를 하자, 나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다. 대충 250억 원을 보유한 자산가로 본 것이다. 겉으로는 막 대해도 속은 다르고 그건 티 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서슬 퍼런 시절이었으나 그때도 돈은 돈이었다.
수사관들은 박형선의 술 심부름까지 해가며 비위를 맞췄고 같이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틈만 나면 나오는 그들의 질문은 "돈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벌었나" 였다. 그들도 결국 월급 가지고 생활하며 공무원 연금 보며 5급 사무관 승진은 가능할지 번민하던 일반적 인간들이었다. 수사관들은 박형선 석방이 결정되자 박형선을 공항까지 태워다 줬다. 비행기 시간을 맞추지 못할 것 같자, 안기부 수사관이 공항에 전화를 걸었다. "여기는 진달래. 여기는 진달래"로 시작하는 수사관의 암구호 직후 공항은 비행기 이륙을 미뤘다. 당시는 그런 시대였다.
박형선은 "광주 내려오면 연락해라. 술 한잔하자"고 한 후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에 타자, 뒷자리에 있던 사람이 박형선을 툭툭 쳤다. 당시 여천시장이었던 A씨였다. "야, 너 때문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 농담조였던 A씨의 말처럼 박형선은 상당한 수완가였다.
임수경 방북사건으로 수사받았던 박형선은 2000년에야 임수경을 대면하게 된다. 당시는 5.18 전야제 NHK 사건 직전이었다. 술을 한잔 마신 후, 몇몇 사람들이 유흥주점(새천년 NHK)에 가려고 하자, 박형선은 "야이 새끼들아 광주다. 오월이다"라고 만류했다고 한다. 직후 박형선은 몇 사람만 본인의 집으로 데리고 와서 술을 마셨다. 직후 임수경의 폭로로 새천년 NHK 사건이 불거져 임종석, 송영길 등이 비판받았다.
박형선은 노무현, 윤석열과도 가까웠다.
노무현과 그의 친분은 말하자면 길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될 당시 민주당 광주 경선을 뒤에서 움직인 게 박형선이었다. 박형선이 있어, 노무현은 광주 경선에서 승리했고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 박형선의 역할에 대해 <중앙일보>는 노풍의 주역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당선자 신분 시절에도 단 둘이 시간을 보냈다. 노무현은 사망 직전에도 담양을 찾아 박형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꼭 보고 싶다,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노무현의 말은 그렇게 마지막이 되었다. 그날 박형선은 세상이 보고 있고 언론이 보고 있다며 노무현을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박형선에게는 미처 갚지 못한 마음의 빚이 남았다.
윤석열과 박형선의 친분은 2003년에 시작됐다. 태평양 변호사가 다리를 놓았다.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일하던 윤석열은 2003년 검찰로 복귀해 광주지검 특수부장이 되었다. 당시 박형선은 광주의 검사들이 관사로 사용하는 계림동 두암타운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때 박형선의 친구(변호사)가 윤석열에게 "광주 가면 다른 놈들이랑은 술 마시지 말고 박형선이랑만 마셔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박형선과 윤석열은 상무지구 대광식당에서 육전에 소주를 마신 후, 집 근처로 자리를 옮겨 술자리를 갖는 일이 잦았다. 이때 나눈 이야기들 역시 하나 같이 중요하고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2003년 12월, 윤석열이 임인철 전 전남부지사의 비리 사건을 수사해 임 부지사를 감옥에 보냈다. 이후 윤석열은 대검 중수부로 영전했고, 박형선은 부산저축은행 사건에 연루된다. 이때 박형선은 당시 광화문에 있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 방문해 문재인 당시 민정수석과 부산저축은행 관련 이야기를 나눴다. 박형선에 따르면 당시의 만남에서 문재인 민정수석에게 조사는 제대로 하되, 예금 인출 사태가 나지 않도록 손을 써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문재인 수석이 도움을 주었고 이후 문 수석은 알선 혐의로 조사받기도 했으나 무혐의 처분됐다.
부산저축은행 사건으로 수사 대상에 오른 박형선은 대검 중수부에서 윤석열과 재회한다. 윤석열은 박형선을 녹음이 되지 않는 방으로 불러, "개인적으로 많이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말했고 박형선은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는다. 훗날 법무부 검찰국장을 지내는 연수원 25기 윤대진 당시 부장검사도 박형선에게 "매일 위에 보고해야 하는 사안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윤석열과 윤대진은 검찰 최심부에 위치하진 않았다.
그러나 박형선은 2심에서 불법 대출 등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일부 유죄만 인정됐다. 유죄로 인정된 부분은 국세청 관련이었는데 국세청이 그들의 판단에 따라 박형선의 회사에 이익이 되게끔 해줄 수 있는 사안을 잘 처리해 주어서 회사 직원이 답례를 했는데 이게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직원은 내 식구이기 때문에 조금 억울한 측면이 있었으나 직원을 언급하지 않고 본인이 한 것으로 진술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박형선의 일방적 진술(주장)일 수 있으나 그대로 서술한다.
이후에도 박형선은 윤석열과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문재인 정권 시절,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과의 소통을 박형선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만나주지 않는다며 (검찰총장을) 그만두든 계속 하든 이야기는 나누고 결정해야 할 것 아니냐고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오거돈 전 부산시장의 행실에 대한 이야기나 용띠 이해찬과 토끼띠 박형선의 갈등, 김근태, 유인태, 이강철 등과 얽힌 여러 이야기들도 있으나 에피소드의 중요성에 비해 검증도 어렵고 문제 소지가 있어 굳이 언급하진 않겠다.
2021년 6월에 박형선 선배의 인생 이야기를 들은 후 1년 6개월 만에 선배는 떠났다. 궁금한 이야기들이 더 있었는데 아쉽다. 그는 광주라는 도시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산 인물 중 하나였다. 이번에 정리해 두는 이 글 역시 진짜에 비하면 부족함이 많겠으나 아주 조금의 기록이라도 그것이 유의미하다면 남기고 싶어 기록한다. 글의 제목은 다음 기사에서 영감을 받았다. 말년의 그는 들불열사기념사업회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민주당이 비례위성정당을 추진하자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에게 잘못된 일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해찬 대표는 "형님, 나 정의당 친구들한테 할 만큼 했소. 정의당이 너무 욕심내고 있소. 너무 현실직이지 못 하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박형선 선배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후 친구와 함께 조문했다. 직후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남겼다. 다음과 같은 기사였다. '노무현 친구, 민주화 헌신... 박형선 해동건설 회장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