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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주 Oct 03. 2022

불편한 편의점


올해 5월부터 성수도서관에서 성인 북클럽 <자갈자갈>진행자로 활동중입니다. 매달 회원들과 책을 선정하는데 이번달 도서는 성동구립 도서관 <한 도서관 한 책 읽기>에서 선정한 [불편한 편의점]이랍니다. 


북클럽에서 나눈 내용을 '독서 토론 활성화 사업 운영 관련 자료'로 사용하신다며 발제도 정해주셔서 편한 마음으로 휴일 오전 단숨에 읽어 버렸답니다. 


표지부터 만화책을 연상시키더니 읽는 내내 만화책스러운 묘사에 고개가 갸웃 유치함도 없지 않지만 딱 웃고 울게 만드는 묘한 매력의 소설임은 분명합니다. 


소설답게 다양한 인물의 서사와 인물이 겪어내는 상황이나 심리 묘사가 쉬우면서도 딱 지금을 살아내는 이들의 적나라한 문체는 마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듯 경쾌함이 친근하게 읽혀지는 소설이에요. 



첫 시작에 편의점 사장 염영숙 여사의 이야기는 <불편한 편의점>에 대한 사전 지식이 전혀 없던 저에게 치매 노인 이야기인가 싶기도 했고 갑자기 노숙자 독고가 등장했을 때는 노숙자가 사기치는 이야기인가 혼자 머리를 굴리며 뒷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 생겼답니다. (제가 소설이나 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죠. 차라리 결론을 먼저 알아야 마음 편히 즐기는 1인입니다.)


그러다 노숙자인 독고가 편의점에 취업(?)을 하게 되고 독고를 중심으로 주변인물의 서사가 진행되며 독고로 인해 그들이 겪어내는 자아상이 하나씩 들어납니다. 어찌보면 독고라는 인물에 의한  주변 등장인물의 성장 스토리인가 싶을 정도오 독고로 인해 많은 것을 깨우치는 등장인물들 입니다. 하나같이 깨달음을 얻는 것 또한 만화적인 요소를 품고 있지 않나 싶지만 결국 작가가 말하고 원하는 이상향이지 않을까 싶어 모조건 해피엔딩도 환영하는 바입니다. 다만 마지막에 독고가 대구행 기차를 타는 이유는 너무 만화적이라서 좀 별로였어요. 




어쩌면 자기 스스로를 잃어버려야만 살 수 있던 독고로 인해 주변인물들은 자기를 찾는 결과를 이루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독고가 보인 행동과 말은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 움켜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기 때문이죠. 우리는 어쩌면 움켜줘야지만 살아낼 수 있다고 여기지만 오히려 움켜진 손을 펴야지만 그 손안에 무언가 들어갈 여지가 생기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는  불편해 보이는 상황이나 인물에 대해서 불편함만 호소하지 그 불편함이 왜 나에게 불편한지 알려고 하지 않는거 같아요. 제가 시리즈로 <불편함에 대하여> 올린 글에도 보시면 우리에게 불편함이란 바로 내가 가지고 있는 혹은 내가 만든 안전지대에 대한 변화이 이뤄질 때 불편함이 올라옵니다. 그 불편함은 불편함을 주기 위해 생기는 것이 아닌 그 불편함에 대한 나의 시각이나 인식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인데 말이죠. 그저 불편함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불편함만 호소할 뿐 왜 그런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불편함을 유발하는 노숙자 독고의 존재는 장사가 잘 안되어 제대로 물건이 갖춰지지 않은 불편한 편의점을 더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불편함을 더하는 독고라는 존재는 그 불편함에 대해서 타자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의 대상이자 불편함을 유발하는 요인인 독고가 타자들에게 오히려 질문을 던져 그 불편함에 대해 스스로 인식 하지 못하는 타자들에게 답을 제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죠. 


건강한 자아 형성에는 공동체가 필요하고 타자를 수요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마침내, 고유한 나를 만나다)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공동체가 불편한 편의점이고 타자는 그 불편한 편의점을 드나드는 인물들인 것이죠. 


독고라는 한 사람의 자아상이 결국에는 불편한 편의점과 관련한 모든 등장인물의 자상이기도 한 것이죠. 이 소설의 건강한 자아상의 시초는 염영숙 여사이기도 하고 말이죠. 건강한 자아상을 제시하는 인물로 인해 또 다른 건강한 자아상이 재탄생되어지는 것입니다. 


소설속에 염영숙 여사를 독고는 '사장님이야말로 자신이 믿는 신을 닮은 사람인다 보다. 이 세계에서 신성을 가진 자는 사장님같이 남에 대한 헤아림이 있는 그러한 자일 것이다.'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염영숙 여사 이야기를 처 시작으로 맺은건 우연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시대에 부족한 신성의 요소를 작가는 염영숙 여사를 통해 비춰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들어주는 것과 따뜻함이라는 요소가 제법 나옵니다. 듣기 보다 말하는 것에 빠르고 따뜻함보다는 견제할 차가움이 앞서는 시대이기 때문일까요? 자신을 지키거나 타인을 경계하기 위해 듣지 않고 차가움을 드러내지만 사람의 이면은 따뜻한 것 앞에 한없이 약해지고 또 그 따뜻함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마지막 독고는 이런 고백을 합니다. '살아가야겠다'라고 다짐할 수 있었던 건 염영숙 여사를 통한 신성과 타인과 나눈 따뜻함으로 비롯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갑자기 독고가 건낸 옥수수수염차가 한잔마시고 싶어지네요.(소설을 보시면 이해하실거에요) 누군가에게 술이 아닌 옥수수수염차를 건내며 따뜻한을 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따뜻함은 서로에게 살아갈 힘을 실어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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