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서평 2025/10
<모순>으로 인생 소설을 만난 듯 지나간 20대의 아쉬움을 이랬어야 했구나를 깨닫게 했던 소설이기에 두 번째 소설로 양귀자 작가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 갔는데 읽을수록 주인공에 대한 서사가 독자로써 이해되지 않는 아쉬움을 품고 바로 <희망>을 선택했습니다.
한 손으로 들기에도 묵직함을 주는 600페이지 가까이 되는 소설 <희망>은 작가에 대한 의심을 품은 채 한편으로는 그 의심을 거둬주길 바라는 독자의 마음으로 읽어 갔습니다.
나는 형 덕분에 이 돌대가리를 가지고도 호랑이 같은 어머니와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나로서는 형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는 셈이었다.
화자인 우연은 자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여러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우연이라는 인물의 성장소설과도 같다고 할까요? 몸의 성장은 먹고 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내적 성장은 자기만의 의지로는 충분히 않음을 우연을 통해 배웁니다.
우연은 자기에게 의미 있고 의심으로 다가오지만 그 의심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은 채로 기꺼이 품어냅니다. 그렇기에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를 통과한 많은 인물을 통해 우연은 드디어 자신만의 길을 다짐하며 자기만의 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우연이가 안타깝고 우연이가 잘 되길 만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품던 독자로써 마지막 우연이 구인광고에 기꺼이 뛰어드는 문장은 마치 영화의 엔딩 장면처럼 마음에 남았습니다.
소설이 길기에 긴 호흡으로 소설을 읽어 내려야 하는 품이 들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는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는 기분으로 읽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모든 인물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고 흔히 겪을 수 있는 상황과 역경이기 때문이었을까요? 특별히 시대적 아픔을 가진 그들이기에 인물들은 시대가 주는 암흑까지도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몰라. 암튼 형은 우리가 모르는 사랑을 하고 있을 거야.
그건 좀 특별한 사랑이겠지.
우연의 형 도연은 운동권 학생으로 <희망>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충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충직함이 미련하다 할 만큼 앞뒤 재지 않는 신념이지만 그로써는 그것이 자신 인생에 대한 최선이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한 자기만의 강직이라고 할까요?
형은 자신의 길만 갔을 뿐이지 어머니는 완전히 무시했다. 최소한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설명만은 멈추는 노력이 있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형의 운동은 실패였다.
자신만 설득하면 됐을 뿐인 형은 되려 자신의 신념이라는 굴레에 갇힌 인물이기도 합니다. 자신만 설득하기보다는 주변을 통해 자신을 살피고 주변을 통해 스스로를 이해하고 설득하게 된 우연으로써는 형보다 성숙하게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어쩌면 자신의 신념 때문에 자신의 생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형을 보면서 우연은 희망을 더 꿈꾸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우상이 더 이상 우상이 되지 못함을 목도함으로써 우연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보게 되었지 않을까요?
타인의 삶에 관여하며 사는 것도 구원의 한 방법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골방의 어둠 속에서 깨우쳤다
나성 여관이라는 환경에서 유일하게 우연만이 나성 여관의 모든 이들에게 관여를 합니다. 그만큼 편견이 없다는 뜻일까요? 모든 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만큼 우연의 내적동력이 된 주변 인물을 통해 우연은 자기만의 내적 환경을 확장해 갑니다.
"네가 누나를 사랑한 것은 곧 너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었겠지.
너는 사랑을 준 만큼 받고 사랑받고 싶었겠지만
인간 정신의 무게는 각각 다르다.
네 고집에서 깨어나.
보고 듣고 믿어버릴 수 있었지만 우연이에게 사랑이자 희망과도 같고 안식처와도 같은 형과 누나에 대한 안기기만을 바랐던 사랑은 찌르레기 아저씨를 통해 또 다른 생각을 자아내게 합니다. 소설 속 인물 중 개인적으로 가장 안타까웠던 인물이 찌르레기 아저씨였지만 마지막까지 그 역시 자신만의 신념과 자신이 지켜내야 할 것을 껴 안으므로 자신에 삶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르게 사는 삶의 방식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른 삶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다른 이의 삶에 개입하므로 우연을 나성 여관에서 고수하던 낡은 생각들을 걷어냅니다. 우연히 보게 된 찌르레기 아저씨의 일생일대 기록은 나성 여관에 맞는 삶만 알았던 우연에게 다른 삶에 대한 마주함과 그 삶에 대한 안타까움과 구원자로서의 사명까지도 떠안게 됩니다.
세상 기준과 점점 멀어지고 대학이라는 시작의 관문이자 끝이 될 것에 대한 확실한 설득이 부족했던 우연은 자신의 삶과 꿈, 그리고 행복을 축소하면서까지 그 삶에 껴 맞추려 하기도 했지만 나성 여관을 통해 지켜보고 개입하게 된 여러 인물의 삶은 더 큰 희망을 우연히 품을 수 있는 작용을 합니다.
저 역시 내가 아는 삶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채 그 삶만이 전부인 듯 살아가며 느껴지는 답답함에 스스로를 가두며 지낸 시간이 깊습니다. 저는 주변 인물보다는 책을 통해서 다른 삶을 알게 되고 그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내 현실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고 할까요?
책에서 만난 모든 문장과 인물들이 저에게는 인생 스승이자 인생 지도와도 같습니다. 우연에게는 자기 삶에 기꺼이 끼어들게 만든 주변 인물일 테고요.
헤쳐 나왔다고 생각하면 또 다른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 노동자의 삶이 개인의 잘못이 아님을 어렴풋하게 인식하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시대적 배경에 따라 노동자의 삶으로서 인생의 고단함만이 전부인 듯 살아가는 그 시대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은 그저 그 삶에 안주하며 하루하루 먹고살기 빠듯한 현실을 개탄하면서도 하루의 생존만으로도 충분히 삶의 짐을 지고 있기에 그 어떤 것에 투쟁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성 여관의 안주인 우연의 엄마가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하루의 생존과 생계를 오롯이 책임지는 엄마를 통해 또 다른 세계관을 품었을 수 있음을 세 자녀는 전혀 모릅니다.
그저 삶에 대한 푸념만이 가득한 엄마라는 존재가 자신들의 미래를 좀 먹는 존재라고만 느꼈을까요? 그저 자신들에게 희망이라고는 품을 수 없는 그저 일상적인고 공기처럼 존재하는 인물로서만 엄마는 존재했던 걸까요? 그 일상의 무게감을 오롯이 혼자만 품고 있던 엄마의 삶이 새삼 애달프게 느껴집니다.
진우연은 아주 꽤 괜찮은 진우연이 되는 것이 옳지 않은가
가장 희망적이지 못한 인물인 엄마를 통해 오히려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은 절망의 모든 짐을 떠안은 엄마의 선택이었을까요? 엄마는 그저 엄마로서 하루치의 삶과 투쟁하며 그 투쟁에 대한 한풀이를 하면서도 그 어느 자녀에게서도 엄마 품에 머물기는커녕 떠나고픈 존재로만 읽히니 우연이의 엄마가 안타까운 인물로 그려집니다.
나성 여관은 누구라도 다 떠나고 싶어 했던 곳이다 그렇지만 나성 여관 그 자체가 떠나버리는 것은 많이 슬프다
우연과 형 그리고 누나에게 엄마와 나성 여관은 생의 최초의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끼게 하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벗어나고 싶지만 모태적 안정감을 놓는 일은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이니 차라리 그 고통보다는 좁고 냄새나지만 엄마의 자궁처럼 안락함을 느낄 수 있던 나성 여관의 그 공간에 그들은 그저 그들을 욱여넣으면 살아갑니다.
나에게 너무나 많은 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었던 밤 잘 가라, 잘 가라, 밤이여
그들에게 밤의 존재와도 같던 나성 여관이라는 환경에게 자발적인 이동을 하게 되는 것은 그들에게 당도할 고통으로 적극적으로 뛰어들기 위한 희망적 서사가 되기도 합니다.
삶에 대한 풍덩은 희망이지만 고통을 껴안는 희망으로의 출발임을 나성 여관을 통해 용기를 내게 됩니다. 나성 여관은 생의 웅크림으로 머물 곳이니 말입니다. 그렇게 작가는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보는 것은 결코 희망적이지 않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 그리고 그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고통에 기꺼이 뛰어들게 만다는 것, 그것이 희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희망보다는 나만의 안락함에 불과한 웅크림의 기억이 있습니다. 희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지만 아무리 읽어도 희망적이지 않은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그들이 부서지고 깨어지며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이 희망임을 시사합니다.
내게 주어진 것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갖가지 장애물 앞에 설설 기기, 이쪽저쪽 눈치 보며 소심하게 살아내기, 오직 그뿐이었다,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자신의 삶이 한심했다는 것을 깨달아야지만 그 삶에 대한 희망을 품게 한다는 것을 우연은 알았을까요? 우연이 희망을 품기 위해 그 많은 고통의 흔적을 보고 들어야 했고 자기 삶에 새겨야 했던 것은 우연에게 축복입니다.
그 누구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직시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이 삶을 지탱할 수 없어형은 영혼조차 비명을 지르는 시대에 살았다
시대적 아픔을 걷어내기 위한 희망 역시 고통스럽지만 그 희망을 통해 연대하는 인물도 만나게 됩니다. 우연의 형과 찌를기 아저씨의 만남은 그 시대적 아픔을 함께 공감하며 이해하게 하는 희망적 동지애라고 할까요?
누나는 꼭 올 것이다 나는 믿는다 다른 사람은 모른다 누나나 형 그리고 내가 나성 여관에 품고 있는 사랑을 그것은 때로 누추했고 더러는 끔찍했으나 그보다 더 많이 오밀조밀했고 아늑했었다. 우리들의 사랑 속에 담긴 분노와 증오와 슬픔 없이 어찌 이처럼 질긴 애정의 끈을 묶어낼 수 있었으리
희망은 온전하게 생기지 않습니다. 낡고 부서지고 깨어지는 고통과 아픔을 통해서만 희망이라는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시대이건 시대적 아픔은 같이 짊어지고 갈 몫이고 자기 삶에 대한 짐 역시 누가 질 수 없이 자신만의 희망을 꿈꾸며 그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