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사탕 May 16. 2023

엄마의 눈을 고치는 약

주말 동안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은 언제나 즐겁고 힘든 것 같다. 그 즐거운 마음은 여행지에 두고 온 것이 분명했다. 내 양손에는 무거운 짐 가방만 들려져 있었으니까.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그 작은 가방 속에서 온갖 물건들이 쏟아져 나왔다. 입지 않았던 옷과 입었던 옷, 혹시 몰라서 챙겨갔던 비상약들, 세면도구와 로션, 선크림, 물통, 모자, 충전기 등등 하나같이 제자리를 찾아달라고 재잘대고 있었다. 이것은 여행이든 명절이든 마찬가지이다. 준비도 정리 결국은 다 내 몫이다.



저녁도 해야 했다. 하루 이틀 집을 비우면서 한 달을 비운 것처럼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고 밥통에 밥이 없다. 그것 또한 모두 계획했던 일.. 왠지 다녀오면 상할 것 같고 먹기 싫을 것 같아서 미리미리 다 비워둔 탓이다. 모든 것이 리셋이다. 일단 빨래는 세탁기에게 부탁하고 쌀은 씻어서 밥솥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 부담스럽게 재잘대던 놈들을 이방 저 방 다니며 모두 제자리에 착착 넣어주었다. 잠시도 엉덩이를 바닥에 붙일세 없이 돌아다니던 나는 생각했다. '역시 나는 부지런한 주부니까.'



그 생각도 잠시.. 정신이 털릴 것을 알기에 일부러 미루었던 일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제 아이들을 씻겨야 했다. 역시나 씻자는 말에 두 아이모두 귀찮다며 짜증을 냈다. 아이들의 짜증소리는 내 화를 돋우는 것 같다. 육아서대로라면 '그렇구나. 너희들도 피곤하지? 그래도 나갔다 왔으니 씻는 게 어때? 아니면 너희가 씻고 싶을 때 얘기해 줄래?' 뭐 이런 식의 다정한 말이 나와야 하지만 아직 나는 멀었나 보다. 아이들의 짜증소리는 스위치였던 게 분명하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밖에 나갔던 남편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며 또 왜 그러냐고 물었다. 조금은 민망했지만 그 덕에 남편이 내 비위를 맞추며 아이들의 샤워를 도와주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얼른 눕고 싶어 졌다. 그런데 아이들이 안방으로 보드게임을 가지고 들어왔다.


"마. 보드게임 하자."

"아이고.. 하긴 뭘 해. 엄마는 힘들어서 못하겠다. 빨리 눕고 싶어."

"한 번만 고고!"

"아.. 정말.. 힘들어 죽겠는데.. 엄마는 안 하고 싶어."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다. 다시 정신을 잃을 때쯤 드디어 게임은 끝이 나고 얼른 자리에 누울 수 있었다. 이대로 쉽게자면 아이들이 아니지.. 이제부터는 이야기 릴레이다. 수수께끼.. 끝말잇기.. 이상한 이야기들.. 그러다가 또 내 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첫째 : "있잖아. 나중에 엄마가 눈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면 어떡하지? 나는 엄마 옆에 항상 붙어 다녀야겠다."

나 : "음.. 그런데 엄마 귀아직 너무 좋아. 뭐 늙으면 잘 안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땐 또 보청기 있잖아. 하하."

둘째 : "엄마. 나는 돈 더 모아서 엄마한테 인덕션 사줄 거야. 히히."

 : "우와. 진짜? 그런데 한 오십만 원은 모아야 할 텐데 괜찮겠어? 하하."

둘째 : "아.. 그렇게나 비싸? . 뭐. 괜찮아."

(안 괜찮아 보였다.)

첫째 : "나는 나중에 커서 엄마눈을 고치는 약을 만들 거야."

나 : "이야. 진? 엄마눈을 고쳐주고 싶구나. 엄마도 그러면 너무 좋겠다. 멋진 생각이야."


'이러다가 아이가 진짜 의사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철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첫째는 그렇게 말하면서 마음이 아팠는지 연신 눈을 닦는 듯했다. 그러더니 훌쩍대는 소리가 들릴까 봐 비염 때문에 코가 막힌다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아이의 모습에 내 눈가도 촉촉해져 왔다.


첫째 : "엄마. 이 불빛 보여? 무슨 색이야?"

 : "당연히 보이지. 노란색이잖아.

첫째 : "와. 엄마. 보이네? 다행이다.

나 : "그럼 보이지. 글자도 아예 안 보이는 거 아니야. 큰 글자는 자음이랑 모음이랑 따로 천천히 보면 읽을 수 있어. 그게 조금 힘들긴 해서 너한테 자꾸 읽어달라고 한 거지. 근데 유통기한은 이제 못 찾겠더라. 글자도 작고 흐려서 말이지."

첫째 : "맞아. 유통기한은 글자도 얇고 작아서 잘 안 보일 수 겠다."


그 사이에 둘째는 어느새 잠이 들어 코를 드르렁거리고 있었고 첫째는 엄마가 조금이라도 볼 수 있다는 것에 안심이 되었는지 통통하고 제법 커진 손을 내 손위에 올리더니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잘게. 엄마도 잘 자. 사랑해."



나만 불편하고 힘든 줄 알았다. 할 수 없는 일이 많았지만 내가 못하는 건 남편이 대신해 주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들 스스로 하면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게 나만의 힘듬이라 생각한 건 내 오산이었나 보다. 아이들도 엄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아프 아쉬움이 많은 듯 보였다. 나만 참는 게 아니었다. 아이들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많이 참아온 모양이다.

작가의 이전글 지우고 싶은 기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