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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May 12. 2023

지우고 싶은 기억

4년 전이었다. 둘째가 오빠가 다니는 유치원에 입학을 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하원길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아이들과 유치원 앞의 놀이터로 향했다.  어느새 놀이터에는 많은 아이들과 엄마들이 모였다. 아이들은 제각각 무리를 지어 즐겁게 뛰어놀았고 동시에 나를 비롯한 엄마들의 수다도 시작되었다



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둘째가 내 손을 잡고서 놀이터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평소에도 자주 그랬었다. 오빠의 친구들과 노는 것이 재미가 없었는지 내 손을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곤 했었다. 그날도 그런 줄 알았다. 가뜩이나 아이 친구의 엄마들과 한참 수다를 떨고 있던 터라 아이의 부름이 살짝 귀찮기도 했다. 마지못해 따라 나온 놀이터밖에서 아이는 조금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엄마.. 집에.. 가자.."

"응? 갑자기 왜? 무슨 일이야?"

"그냥.. 가자.. 빨리.. 흑.."



너무 갑작스러웠다. 흐릿하게 보이는 아이의 얼굴은 우는 듯했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 머물렀다. 놀이터에 온 지는 이제 겨우 5분 남짓었다.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급하게 가방을 챙긴 뒤 엄마들에게 인사를 하고 아이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아이를 씻기면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오늘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친구랑 싸운 거야?"

"아니.. 몰라."


아이는 뭔가 말 못 할 사정을 숨기려는 듯 보였다. 그래서 더욱이 어떻게든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한참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학대를 당하는 뉴스가 자주 나오곤 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고 다시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혹시.. 유치원에서 누가 때렸어?"

"음.. 몰라."

"괜찮아. 엄마한테 말해줘. 혹시 선생님이 때렸어?


잠시.. 내 눈치를 보는가 싶더니 아이가 말 이었다.


"응. 선생님이 머리를 이렇게 했어."


하며 아이는 그 작은 손바닥으로 내 앞머리 쪽을 조금은 빠르게 툭툭 내리쳤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했다. 적어도 오늘이 처음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물어보아도 같은 대답만 돌아왔다. 화가 났다. 심장은 좀 더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고 두 팔은 덜덜 떨렸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이성적으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아이의 담임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아주 상냥했었다. 자기의 애도 아닌데 아이를 볼 때마다 안아주고 심지어 볼에 뽀뽀를 할 때도 있었다. 진심인지 가식인지 모를 정도로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갑자기 그 행동들과 오늘의 일이 겹치면서 혼란스러웠다. '아.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르겠구나.'싶었다. 소름이 돋았다. 나쁘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나쁜 사람 같았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기가 무서웠다. 자기는 그런 적이 없다고 할 것이 분명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휴대폰을 들어 유치원 원감선생님께 전화를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드리고 CCTV를 요청했지만 CCTV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다고 했다. 뾰족한 답을 얻지 못한 채 통화를 끝냈다. 곧이어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역시나 선생님은 절대 그런 적이 없다고 믿어달라고 했다. 사실 예상했던 답변이라 믿음이 가지 않았다. 잠시 후 원장선생님께서도 전화를 주셨다. 경찰이나 다른 엄마들에게 소문내지 않고 유치원으로 바로 전화 주신 거는 정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사실 확실한 일이 아니니 소문낼 일도 아니었다. 원장선생님은 통화말미에 담임선생님을 믿어달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쌓인 불신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다. 그런데 CCTV가 없는 한 증명할 방법은 전혀 없는 듯했다. 다행인 건지 그 와중에 아이는 평소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아이가 그런 이야기를 꾸며낼 이유가 없었다.



음날 아침이었다. 유치원에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나와 달리, 아이는 당연히 가야 할 곳이라는 듯 평소처럼 옷장에서 옷을 고르며 나에게 말했다.


"엄마.. 근데.. 어제 입은 카디건에.. 코피가.. 나 다른 거  입을래."

"응? 무슨 코피?"

"..."

아..! 혹시 어제 놀이터에서 코피 났던 거야? 그래서 집에 가자고 어?"

"응. 헤헤."

"에휴... 엄마한테 말해주지 그랬어.. 코에 휴지 꼽는 게 창피해서 집에 가자고 그랬구.. 에고.."


아이가 내 손을 잡더니 카디건에 묻은 코피를 한 방울 한 방울 짚어주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평소에도 코피가 잘 나는 편이었다. 코 점막이 약하고 비염이 있어서 조금만 건드려도 코피가 곤 했었다. 하필이면 그날 놀이터에서 코피가 터졌던 모양이었다. 놀란 아이는 코피가 흐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나를 놀이터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코피가 더 이상 흐르지 않도록 코를 훌쩍거렸고 나는 그것을 우는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 같다. 원래 이때 아이의 코피를 발견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이의 코에서 코피가 들락날락하는 줄도 모른 채 왜 그러냐고 묻기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그럼 왜 아이는 선생님이 때렸다고 했을까?' 그러고 보니 아이는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엄마가 자꾸 물어보니까 선생님이 쓰다듬어준걸 그냥 말했던 것 같았다. 스스로 너무 못난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눈이 좋았더라면 절대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별거 아닌 일을  크게 부풀린 셈이었다. 머릿속이 캄캄해졌다. 아무 죄도 없는 선생님을 순식간에 가해자로 몰아세운 것 같았다. 얼마나 당황스럽고 억울하셨을지 너무 죄송스러웠다.



유치원 하원길에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해명을 하려고 하셨다. 너무 죄송스러웠다. 얼른 선생님을 안아드리며 오해가 있었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다. 그런 나에게 믿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선생님이셨다. 이렇게 좋은 사람에게 나는 또 하나의 상처를 주고 말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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