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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Jan 23. 2023

운명은 정해져 있는 걸까?

내겐 허락되지 않은 아빠의 존재

"엄마. 아빠 배고프겠다. 엄마가 보온병에다가 도시락 좀 싸다 주지."


"그래야겠다."



어느 날 갑자기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어떻게 잘못되었는지는 듣지 못했다. 확실한 것은 아빠가 누군가를 피해 여관방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래도 엄마와의 사이가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도시락을 싸서 다녀오시는 것만 봐도 죽일 놈은 아니었다.



딱 그때까지 만이다. 그 뒤로 나는 아빠를 보지 못했다. 이번에도 예전처럼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도, 기다리란 말도 없었다.




엄마가 술에 취한 모습을 자주 보았다.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만한 상태로 들어와서는 누운 채로 토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나는 그때마다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공포를 느꼈다. '술'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무서워졌다. 그럴 때마다 오빠는 내 옆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아빠라는 존재 대신 나에게는 오빠가 있다.



아빠와의 연락이 끊기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학교를 앞두고 다시 이사를 했다. 이번에 이사한 집은 한옥집이었다. 가운데에는 주인 할머니가 살고 있었고 양쪽으로 3개의 방 정도를 세를 내어주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안쪽의 방이 우리가 살 곳이었다. 방문은 창호지로 된 미닫이 문이었고 화장실은 공용으로 사용했다. 부엌은 싱크대 하나와 그 아래 수도호스가 있어 큰 대야에 물을 받아서 몸을 씻어야 했다. 여태껏 살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마당 한가운데에는 동그랗게 생긴 화단이 있었다. 아주 예전에는 우물이었나 싶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창호지방문을 열어젖히면 그 화단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나는 비가 오는 날이면 방문을 열어 그 화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것을 좋아했다. 빗물이 지붕에서 흘러 아래로 떨어지면서 양동이에 첨벙거리고 화단의 초록빛 잎사귀들은 비를 맞으며 한없이 생기가 넘쳤다.



중학생이 되니 교복도 맞춰야 하고 등록금도 내야 했다. 엄마가 한 달 동안 식당에서 일하고 버는 돈은 130만 원정도였다. 그 돈으로 우리 세 식구가 생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용돈이라도 벌어보자는 심정으로 동네마다 배치되어 있는 생활광고지를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 아르바이트면을 펼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천천히 찾아보았다.


'아! 이거다. 한번 해볼까?'


그 일은 찹쌀떡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매장이 아닌 길거리에서 팔아야 했는데 한팩을 팔면 15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친구와 나는 각자 4팩씩 가방에 넣어서 무작정 길거리로 나섰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가가서는 찹쌀떡을 사달라고 부탁을 했다. 영업을 잘했을 리는 만무하고 교복을 입은 여자아이들이 찹쌀떡을 사달라고 하니 얼마나 불쌍해 보였을까? 불우이웃을 돕는다는 생각을 하며 사주지 않았을까 조심히 생각해 본다. 그렇게 3팩 정도를 팔고 나니 손과 발이 꽁꽁 얼어붙었다. 눈도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았던 성냥팔이 소녀의 심정이 이런 걸까? 소녀처럼 얼어 죽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배까지 고파왔다. 결국 나머지 한팩은 친구와 함께 질겅질겅 씹어서 다 먹어버렸다. 나는 원래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인데 무엇 때문인지 이날만큼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며 용기가 대단했다. 이 모든 것이 슬프거나 창피하지가 않았다. 겨우 3천 원에 불과하지만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뿌듯했고 엄마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만 같아서 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세 식구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가난이라는 늪으로 깊이 빠져 들뿐, 헤어 나올 수가 없었고 아빠의 빈자리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그 당시 중, 고등학교에는 3개월마다 공락금을 내야 했는데 우리 집 사정에 15만 원씩 하는 공락금은 꽤나 부담이 컸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쯤에 하필이면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자 공락금을 낼 수도 없게 되었다. 엄마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말씀하셨다.


"별아. 이제 더 이상 안 되겠다. 학교에 공락금 못 낸다고 해.. 미안하다."


난감하고 속상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잘하거나 좋아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그냥 국민학교 때처럼 다른 친구들이 다니니까 나도 당연히 다녀야 할 거라고 생각만 했었다. 아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다녔었다. 공부를 안 하니 성적은 뒤에서 10등 정도에 불과했다. 공부를 잘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엄마의 말을 듣고 나니 나는 남들 다 다니는 학교마도 이렇게 쉽지 않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 졌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몇 시간이 흐르고 담임선생님께서 나를 따로 부르셨다.


"별아. 내가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랑 조금씩 돈을 모았어. 이번에 공락금은 이렇게 해결하자. 너는 공부만 열심히! 알겠지?"


세상에.. 너무 감사했다. 감사해도 감사하다고 기뻐하는 내색도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기가 죽을 데로 죽은 나였다. 그냥 고개를 숙인 채로 "고맙습니다." 이 한마디가 전부였다. 고마운 선생님들 덕분에 나는 계속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그 뒤로도 나의 담임 선생님께서는 내 얼굴과 기분을 살피셨다. 가끔 나를 학교 발코니로 부르셔서 나를 위로해주시곤 했다.


"별아. 저기 보이는 저 집이 선생님이 살던 집이야. 선생님도 어릴 때 많이 가난했거든..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살다 보니까 이렇게 선생님도 되었어. 너무 기죽지 않아도 돼."



그날 이후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내가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지금 공부를 하지 않으면 선생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일 같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험공부라는 것을 해봤다. 집에는 책상도 없었고 제대로 된 식탁조차 없었다. 그냥  라면박스 위에  작고 낮은 찻상을 올려두고 책 한 권과 연습장 반장을 펼쳐놓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뒤에서 10등 하던 성적은 상위권까지 올라갔다.



선생님. 그땐 제가 너무 어리석어서 고마운 내색도 잘 못했던 것 같아요. 선생님의 따뜻한 가르침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살고 있어요. 그땐 정말 감사했습니다. 보고 싶어요 선생님.



어느 날 밤이었다. 엄마가 엎드려서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울다가 욕을 퍼붓다가 다시 울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아빠인 것 같았다. 전화를 끊은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내일 100만 원 보내준대.


"와~ 정말이야? 너무 잘 됐다 엄마. 이제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우리 옷도 하나씩 사 입으면 되겠다 그렇지?"


갑자기 세상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해는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등을 돌리면 어두운 그림자가 보였고 다시 등을 돌리면 눈부신 태양이 있었다. 아빠가 우리를 잊지 않았다는 생각에 기뻤다. 내가 다시 등을 돌리니 희망의 빛이 있었다. 내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나중에는 아빠 다시 돌아올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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