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가 크면 실망이 크다. 또다시 기대를 하고 실망을 해버렸다. 백만 원은커녕 연락이 두절되었다. 이제 우리에겐 아빠란 존재는 없다. 다시 돌아와도 우리가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물론 다시 만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 뒤로 단 한 번도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었고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아빠의 그늘밑에서 사는 것보다 고아원의 친구가 더 잘 사는 것 같았다. 나보다 더 좋은 옷을 입었고 준비물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차라리 정부의 도움을 받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류상 부모가 모두 있는 경우에는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엄마는 그 사람의 가출과 연락두절을 이유로 이혼소송을 진행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그 사람의 연락은 없었다. 법원에서 재판을 받는 순간에도 엄마는 혼자였다. 그렇게 엄마와 그 사람은 다시는 만날 이유도 지켜줘야 할 필요도 없는 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자식은 다르지 않은가? 그즈음 이모부의 반복되는 외도로 이모도 이혼을 한 상태였다. 그래도 이모부는 달랐다. 사촌오빠들의 학비는 물론이고 생활비도 보내줬다.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는 언제든 연락을 해서 따로 만나기도 했다. 그것마저도 부러울 정도로 우리는 완전히 남인 것처럼, 아니 남보다 더 모르는 사람처럼 전혀 왕래가 없었다.
왜? 도대체 왜? 나의 아빠라는 사람은 우리가 왜 보고 싶지가 않은 걸까? 나와 오빠가 어떤 잘못이라도 한 걸까?
혹시나 내가 모르는 사고라도 생겼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끔 등본이나 호적초본등을 떼어보면 주소지가 바뀌어 있기도 하는 걸 보니 어디든 잘 살아는 있는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리를 자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도 이젠 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에서 호구조사를 할 때도 아빠가 없다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손을 번쩍번쩍 들었고 학교에서 지원해 주는 도움은 모두 받아냈다. 그래야 엄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것만 같았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아빠의 부재도 아니었고 가난도 아니었다. 오히려 주변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던진 말들이 겨우 붙들고 서 있는 나를 힘없이 넘어트릴 뿐이었다.
"이혼은 왜 한 거야?"
"이혼을 했어도 아빠랑 연락은 할거 아냐?"
"그래도 아빤데 그러면 안 되지. 찾아는 봐야지."
"아빠를 미워하면 안 되잖아."
개뿔.. 이런 말들이 나에게는 치명적인 상처로 다가왔다. 답이 있는 질문을 해야 답을 하지.. 나도 아무나 붙들고 묻고 싶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낳기만 하면 다 부모인가? 가난하면 어떻고 모자라면 어떤가.. 적어도 가족이라면 서로 생사는 알아야 하지 않은가? 나를 찾지 않는 사람을 굳이 내가 찾을 필요가 뭐가 있냐 말이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엄마와 우리들의 힘만으로 일어서야 했다. 후벼 파서 먹고 살 재산도 없었고 앞으로 벌어들일 수입도 보장되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기 위해 이혼을 했지만 아빠라는 사람이 같은 하늘아래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격에서 제외된다는 것이 우리를 더 고립되게 만들었다.
엄마의 활화산은 다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동사무소에 가서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결국 기초생활수급자 자격을 얻었다.
"사람이 좋게 좋게 하면 바보로 보는 세상이야. 화를 내고 억세게 나가지 않으면 여자 혼자 살아갈 수도 없어. 세게 나가니까 이제야 해주네. 해줄 수 있는 건데 안 해줬던 거야."
그렇다고 뭐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해도 별다른 혜택은 없었다. 지원금 같은 것은 전혀 없었고 병원비 할인과 일 년에 한두 번 배급해 주는 쌀이나 멸치, 쓰레기봉투 정도가 전부였다.
우리는 셋이 하나가 된 듯 똘똘 뭉쳐야 했다. 엄마가 아침 7시에 구내식당으로 출근을 하면 나는 도시락을 싸는 것으로 등교준비를 대신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빠와 나는 도시락 설거지와 저녁준비를 해서 챙겨 먹어야 했다. 그리고 최대한 빨리 취업전선에 뛰어들기 위해 고민할 것도 없이 곧바로 상업고등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 흔한 피아노학원이며 입시학원이며 단 한 번도 다닌 적이 없었다. 상업고등학교에 오니 컴퓨터로 하는 수업이 많았고 그에 관련된 자격증도 많았다. 친구들이 하나 둘 자격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욕심이 생겼다. 한 달에 6~7만 원씩 하는 학원비를 낼 형편이 못되었지만 독학으로도 자격증을 딸 수 있다기에 나는 독학으로 자격증 두 개를 취득했다.
나는 사춘기가 지나가도 사춘기인 줄 모르고 엄마에게 응석 한번 부려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엄마가 힘들지 않을까를 고민해야 했고 돈을 아끼는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때로는 장도 봐야 했고 요리도 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이 힘들다고생각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을 것이다. 내 옆에 엄마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 아니 살아냈다. 계속되는 이사에도, 끝이 없을 것 같은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며 언제나 함께였다. 그 안에는 엄마의 자신도 없었고 오빠와 나 자신도 없었다. 누구 하나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서로와 서로의 경계선이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로 그냥 앞만 보고 살아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