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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Jan 27. 2023

행복은 불행 속에서 피어난다

포기가 아닌 인정

가난이라는 어둡고 지루한 터널에서 이제 막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그 터널이 얼마나 춥고 캄캄했는지는 들어가 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해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끔 뉴스를 보다 보면 빚더미에 앉아 더 이상의 미래를 꿈꾸지 못한 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를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 고통의 가운데에 서있는 사람은 가난이라는 벽과 빚이라는 산에 가로막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머리 위의 하늘을 한 번만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모두 같은 하늘 아래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살고 있는 것뿐이지 않나? 언젠가는 이 높은 산을 넘고 벽을 지나면 또 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꼭  저 산을 넘지 않아도 머리 위의 하늘은 매일매일 새로운 모습으로 나에게 다가와 줄 임이 분명하다.



예전에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장애인이 될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릴 것 같아."


"거지같이 살바에 뭐 하러 사냐?"


이런 말들이 과연 맞는  말인가? 조금이라도 행복하지 않다면, 아니 불행할 것 같으면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말하는 자는 얼마나 행복하고 얼마나 살고 싶은 사람인가?



'자살'이라는 글자를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가 된다. 살기 싫을 만큼 힘이 들 때 단 한 번이라도 거꾸로 생각해 보면 좋겠다. 돈이 많다고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쯤은 이제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사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어도 외로움에서 오는 공허함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다. 금수저냐 흑수 저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숟가락으로 어떤 밥을 누구와 얼마나 맛있게 먹느냐가 행복의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제 나는 가난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실명'이라는 길에 발을 들였다. 력(視力)이라 하면 물체의 존재나 형상을 인식하는 눈의 능력, 즉 보는 능력, 보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명한 후에는 눈에 아무리 힘을 준다고 한들 보일리가 만무하다. 내 노력과 의지만으로는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나는 단 한 번도 '자살'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시한부가 되어서야 비로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앞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소중해졌다.



그래서  그 파란 하늘을 보기로 했다. 내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산이라면 그 산을 넘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생각해 버리면 된다. 가진 만큼만 쓰고 보이는 만큼만 보면 된다. 더 많이 가지려 한다거나 더 많이 보려고 하는 만큼 행복은 저 멀리 달아나버리고 결국에는 좌절이라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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