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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사탕 Jan 28. 2023

두 개의 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오빠와 나만의 생각이었다. 15년간 식당일을 하셨던 엄마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사실 창업을 한다는 자체가 마음에 들지가 않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식당일 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들아. 한 달에 130만 원은 너무 부담스럽지 않나?  동네 안쪽인데.. 그만큼 낼 수가 있겠나?"


"아니다. 우리 셋이 하면 월급은 나갈 일이 없으니 할 수는 있겠네. 나는 모르겠다. 너네가 알아서 결정해라."



그냥 왠지 잘 될 것만 같았다. 살짝 기대도 되고 흥분도 되어있었다. 일단은 가게가 새 건물이라 새하얀 도화지에 처음 그림을 그릴 때처럼 설레었다. 우리가 꾸미는 데로 가게는 꾸며질 것이고, 우리 셋이 열심히 색칠하면 원하는 데로 좋은 결과물이 될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도 5천만 원의 보증금은 가게가 망해도 살아있을 테니 든든했다.



그즈음. 남자친구의 집에서는 아버님이 퇴직하시기 전에 결혼하기를 원하셨다.


"아버지가 올해 안으로 결혼하는 게 어떻냐고 하시던데.."


"아. 그래? 근데 나는 아직 안될 것 같아. 우리 집이 아직 형편도 그렇고.. 엄마가 곧 김밥집을 차리실 것 같아서.. 아무튼 안될 것 같아."



이건 뭐.. 프러포즈도 아니고.. 얼렁뚱땅 아닌가? 아니 내 입장은 물어보지도 않고 자기들만 오케이 하면 다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속으로는 내심 불편하다 느낌이 들었다.



아직까지 나에게는 가족이 먼저였다. 결혼이야 언제든지 하면 될 것 같았다. 물론 남자친구의 집에서는 퇴직 전에 결혼을 해야 그래도 꽤나 많은 축의금을 받을 수 있었기에 급했던 마음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내가 지금 결혼을 하게 되면 그 5천만 원이 반타작이 날것이 분명하고 그러면 또 엄마와 오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 이야기가 오가기 몇 달 전에 나는 밑도 끝도 없이 울먹이며 남자친구에게 말했다.


있잖아.. 우리 그만 헤어지자. 사실 내 눈에는 유통기한이 있어.



하.. 유통기한..? 어디서 그런 발상을 했는지.. 유치 찬란한 단어였다. 그 말을 하면서 얼마나 울었던지.. 사실 붙잡아 주길 바라고 한소리였다. 정말로 이대로 헤어졌다면.. 그 이유로 헤어졌다면 나는 끝없는 절벽으로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런 나를 절벽의 끝에서 붙잡아 준 남자친구의 입에서 결혼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내 상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 당시에 결혼은 나에게 사치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결혼 이야기는 접어두었다.



결국 가게를 계약하고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갔다. 털털한 성격의 엄마와는 달리 오빠와 나는 쓸데없이 꼼꼼함이 하늘을 찔렀다. 머리를 싸매고 수험공부라도 하는 사람들처럼 가게이름을 짓는 것부터 간판디자인, 내부 인테리어, 메뉴 등등 하루종일 컴퓨터를 붙잡고 그려대기 시작했다. 3D 입체로 그려서 요리조리 배치를 해보고 난리부르스윌리스였다. 그런 우리를 뒤에서 지켜보던 엄마는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 차 댔다. 그러다가 행동개시가 떨어지면 엄마는 이미 작업을 수행하고 계셨다. 오빠와 엄마는 행동도 빨랐다.



사실 나야 입만 살아있었고 간판과 바닥타일을 제외한 모든 내부 인테리어는 오빠와 엄마가 작업을 했다. 드디어 간판이 걸리고 내부 인테리어를 마무리하고 나니 정말 그럴싸한 가게가 되어있었다.



15평의 가게에 4인테이블이 6개, 2인테이블이 2개로 총 28명이 동시에 식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완성되었다. 전면유리 쪽에는 김밥을 바로바로 쌀 수 있는 테이블이 위치했고 가게의 안쪽으로는 오픈주방으로 꾸며주었다.



자. 이제 고생길이 시작되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인근 도로가의 김밥집들은 24시간을 돌려 낮타임과 밤타임으로 나누어 장사를 해왔지만 동네 안쪽에 위치한 우리 가게에서는 24시간은 무리였다. 왜냐하면 오밤중에는 돌아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그 시간에 사람을 써서 월급을 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새벽시간과 이른 밤시간의 손님을 놓치기에는 내심 아까웠다. 욕심을 내기로 했다.



지독했던 가난만큼이나 우리 셋은 지독하기 그지없었다. 새벽 4시 30분에 가게 문을 열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다 보니 잠에서 깨기도 전에 가게에 이미 도착해 있었고 어느 순간 보면 나와 오빠는 김밥을 싸고 있고, 또 어느 순간 보면 차의 뒷좌석에 댓 자로 뻗어서 흐느적 되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물론 엄마의 고생은 훨씬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새벽출근과 동시에 거대한 밥솥에 밥 짓기를 시작으로 계란지단과 우엉조리기, 당근 채썰기 등등 김밥재료를 준비하고 야채들을 다 손질해 두는 것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 들어오는 손님의 주문을 받아야 했다.



정말 다행인 것은 노력하는 만큼 가게의 매상은 계속해서 오르기 시작했다. 동네 장사이다 보니 배달을 피할 수는 없었고, 그래서 오빠는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던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을 하기 시작했다. 주말이 되면 이미 새벽부터 500줄에 이르는 김밥 주문부터 하루종일 이어지는 배달주문과 홀에 들어온 손님, 포장주문까지, 혼이 빠질 것 같았다. 결국 주방보조 이모님을 한분 모셔서 함께 하기로 하고 정신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퇴근할 때가 되면 만 원짜리만 따로 모아두었던 돈통이 꽉 차서 흘러넘쳤고, 매일같이 통장에 돈을 넣다 보니 태어나서 처음으 VIP통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호했다. 사실 돈보다도 몸이 너무 지쳐서 제발 이 생활이 끝나길 바랐다. 잠이라도 실컷 자고 싶었다. 피곤해지면 피곤해질수록 내 눈은 점점 더 침침해졌다. 손님이 내민 오천 원짜리 지폐를 만원으로 착각을 했고 더 많은 거스름 돈을 줄 때도 있었다. 눈물이 핑 도는 상황에서도 그 눈물마저도 꿀꺽 삼켜야 다. 내가 슬퍼지고 나약해지면 내 꼴이 우스워질 것만 같았다.



우리의 몸이 천냥이라면 눈은 구백 냥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피로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가게 문을 열고 오전 장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토할 것 같은 어지러움을 느꼈다.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그 길로 가게문을 닫고 병원으로 향했다. 링거를 맞고 하루 종일 누워만 지냈다. 하지만 이미 열어둔 가게를 이렇게 접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다시 지독한 일상 시작되었다. 대신 이모님이 한분 계시니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을 하고 오후 네시쯤 퇴근하는 걸로 정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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