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아르테미스를 향한 고백

포세이돈 신전 앞에서 어느 노인을 만났다. 처음 보는 나에게 그는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정말 아름답지 않아요? 여기 올 때마다 매번 같은 감동을 느껴요."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영국이요. 그렇지만, 나는 그리스인이에요. 그래서 자주 와요. 특히, 여기 수니온을."


나는 그의 말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항상 같은 감동을 주는 대상이 나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를 눈치챘는지 그는 내게 이어서 설명했다. 포세이돈 신전이 지닌 색이 주는 감동을 말이다. 우리 대화에 그의 사위가 끼어들었다. 그 어느 신전을 가도 이런 색은 볼 수가 없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흔한 회벽색으로 보이던 신전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그의 딸이 다가왔다. 맞아. 특히, 이 하늘빛과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곳은 여기밖에 없어. 신전은 하늘의 푸른색으로 점차 물들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나를 제외한 그들 모두 그리스인이라는 점이었다. 모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편할 텐데도 나를 위해 계속 영어를 사용했다. 그다지 영어를 잘하는 편이 아닌 터라, 중간중간 그들의 대화를 놓치는 경우도 있었는데도 그들은 나를 계속해서 신경 썼다. 나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그리스를 오게 된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중에서도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였던 포세이돈 신전과 함께 보름달을 본 경험을 힘주어 말했는데 그들은 하루 지난 나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여행을 온 지 나흘이 되어서야, 모처럼 나의 여행 페이스를 되찾은 기분이었다. 영어를 잘하지 않아도 일단 즐겁게 대화하자는 것이 나의 모토임에도 최근 며칠 동안 꽤나 뚝딱거렸다. 오랜만에 하는 해외여행이라 그랬을까. 지난 일은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여행하는 나로 돌아왔다는 것이 중요할 뿐. 처음 본 이들과 진심을 다해 대화하고, 홀로 온 여행자를 위해 기꺼이 사진을 찍어주고, 머무는 곳 어디든 애정을 담아 걷고, 매 순간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이 모든 태도는 내가 여행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다.


"제 손글씨는 그다지 멋진 편은 아니에요."

"상관없어요.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그리고 우리의 대화를 기억하려는 뿐이에요."


아니나 다를까. 어김없이 그는 나의 코레오 쓰기에 당첨됐다. 그리스와 함께 기억할 손글씨가 하나 더 늘어난 노트를 가방에 넣으며 생각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을 타투로 새겨볼까? 코레오 쓰기에 의미를 하나 부여한 채 자리를 떴다.

 



아마, 여기 어디쯤 일 것 같은데.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다. 덩치 큰 카메라와 삼각대를 가지고 자리를 잡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들은 나처럼 포세이돈 신전과 보름달을 한 프레임에 담으러 온 이들일 터였다. 수백 번 아니 어쩌면 수천번을 본 사진 한 장으로 어렵지 않게 보름달을 보기 위한 최적의 촬영 장소를 알아낸 내가 기특했다.


포세이돈 신전을 처음 알게 된 계기는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본 사진이었다. 모하메드 무헤이센의 사진이었다. 그는 두 번의 퓰리쳐 상을 수상하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활동하는 사진가이자, Everyday Refugees Foundation라는 비영리 단체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를 비롯해 여러 국가를 넘나들며 난민을 취재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그는 포세이돈 신전에 떠오른 보름달을 찍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사진을 보며 달 중에서도 보름달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언젠가 그곳에서 보름달을 보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보통 보름달은 음력 15일과 16일, 양일에 걸쳐 뜬다는 사실이 바로 수니온에서 이 박을 결정한 이유이기도 했다.


전문 장비로 무장한 이들 사이에서 나 역시 회심의 장비를 꺼내 들었다. Galaxy S23 Ultra. 물론, 이 스마트폰으로 찍는 달 사진은 말이 많다. AI로 달을 인식해 달의 표면에 자리 잡은 크레이터 그림자를 덧씌워주는 기술이 적용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니까. 뭐, 그래도 내 선에는 이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우선, 큰 장비를 들고 다니며 배낭여행을 하는 것은 부담이 됐다. 게다가 나는 사진가가 아니기에 일반인이 할 수 있는 선택에서 만족하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래도 조금 머쓱하긴 했다. 기죽지 말자며 스마트폰을 거치할 삼각대를 꺼내면서도 주변 사진가들이 내 팔뚝보다 두꺼운 카메라 렌즈를 교체하는 모습에 와!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으니까.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하메드 무헤이센이 이곳에 있는지 살폈다. 그가 찍은 사진만큼이나 그의 얼굴도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본 터라 그가 이곳에 있다면 단 번에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는 만날 수 없었고 그에게 사인을 받겠다는 꿈(하하하!)도 다음 기회로 미뤄야 했다. 대신 그가 머물렀던 장소에 내가 있다는 사실에 왠지 모를 뿌듯함이 번졌다.


그러나, 스스로 기특해하던 마음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고 초조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밤 보름달을 봤던 시간보다 훨씬 늦도록 달이 떠오르지 않아 애가 탄 것이었다. 하염없이 동쪽의 포세이돈 신전을 보며 달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아르테미스 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요! 오늘도 보름달이 뜨는 게 아니었나요? 애꿎은 아르테미스를 찾기 시작했다. 이상하단 생각에 온갖 포털 사이트란 사이트는 다 들어가서 보름달이 뜨는 시간, 보름달이 뜨는 방향, 음력 15일과 16일에 뜨는 보름달의 차이 등을 사정없이 검색했다. 그리고 명쾌하게 알아낸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연속적으로 터지는 셔터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할 때서야 스마트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보니,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반쯤 얼굴을 내민 달의 밝기에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태양과 같았다. 아니, 정말 나는 그 순간 일출을 보는 줄 알았다. 사진을 찍으러 왔다는 사실을 잊은 채 잠시 이성이 마비되었다. 숨 막히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말이었다.

 

내가 그날 본 달이 올해 뜬 첫 슈퍼문이라는 것을, 게다가 그것이 풀 벅 문이라는 사실을 안 것은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아테네 국제공항으로 향하던 길에서였다. 〈포세이돈 신전 집어삼킨 거대한 '슈퍼문'〉이라는 제목의 한겨레에서 보도한 기사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기사에는 사진이 삽입되어 있었는데 그날 내가 본 보름달이었다. 사진의 출처는 로이터 통신. 그때 수없이 들었던 셔터 소리 중 하나가 저 사진을 남겼을 거란 생각에 다시 감격하고야 말았다.

 

회심의 장비로 촬영한 포세이돈 신전에 떠오른 2023년 첫 슈퍼문

 

자칫 주변에 방해가 될까, 보름달을 보며 들떴던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발만 동동 구르던 순간으로 회기 했다. 고대 그리스인이 달을 신격화하고 섬기며 사랑했던 이유를 눈으로 확인한 그 순간을 말이다. 인정 사정없이 책망했던 아르테미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 어떤 말이 좋을까. 나는 신중하게 말을 골라보았다.


"내가 만약 또 다른 신을 믿게 된다면, 그건 다름 아닌 당신이 될 거 같아요. 아르테미스, 당신이요."

이전 06화 두 번째 서른넷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