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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카잔차키스를 생각하기 좋은 섬

"혹시, 여기서 책을 봐도 되나요?"

"아 네. 들어오세요." 


분명 대답은 긍정문이었는데, 나라는 존재를 내켜하지 않는 눈빛을 읽고야 말았다. 방금 전, 입구에서 경비원에게 허락받고 들어온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해야 저들의 초조한 동공이 진정될까. 이방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라클리온 공립 도서관 사서들은 나를 낱낱이 살펴보기 시작했다. 사물함에 소지품을 넣어두고 둘러보라는 말에 네네, 열심히 대답을 반복했다. 그래야 날 선 시선이 좀 풀릴까 싶어서. 그러나, 의외의 지점에서 경계 태세가 순식간에 풀렸다.


"카잔차키스 책은 어디에 있어요?"

"카잔차키스요?"

"네, 니코스 카잔차키스요. 여긴 크레타잖아요. 도서관이라길래,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를 볼 수 있나 해서 왔는데. 우리나라에선 그리스어로 쓰인 책을 찾기 어렵거든요."

"아! 여기요. 이 책장에 꽂힌 책이 모두 카잔차키스가 쓴 거예요."


그들은 다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카잔차키스의 책장 앞까지 와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꺼내주었다. 아까와 사뭇 다른 몸짓이었다. 나는 책을 건네받아 주저 없이 펼쳤다. 아마 이쯤일 거 같은데.


"그리스어 읽을 줄 알아요?"

"전혀요.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데 도와줄 수 있을까요? 제가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는데, 원서는 어떻게 쓰여있는지 궁금해요. 화자가 양치기와 만나는 장면이에요. 양치기가 화자에게 담배가 있냐고 물어보거든요."


우리 셋은 그들의 사무공간으로 이동했다. 나는 한국어로 쓰인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내가 찾는 대목이 있는 15장을 펼쳐놓았고, 사서 둘은 합심하여 원서의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같은 15장을 살피기 시작했다. 둘 중에 하나가 먼저 소설에서 양치기를 발견했다. 여기 있네요. 담배가 있냐고 물어보는 양치기. 나는 전혀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문자가 펼쳐졌다. 대신 문장 아래로 손가락을 이용해 밑줄을 치며 읽는 사서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영어로 번역하여 읽어주었기에 가능했다. 한 명이 막히면 다른 한 명이 마저 번역해서 읽어주는 식이었다. 담배가 없다고 하니까, 양치기는 화를 냈죠. 그럼 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냐고. 맞다. 그 대목. 나는 그 부분만 이미 여러 번 읽었기에 너무나 잘 아는 화자와 양치기의 대화이다.


"화자는 책, 수건, 종이, 연필, 칼 이런 게 있다고 하죠. 양치기는 다시 화를 내요. 그런 것은 자기도 있다고. 그렇지만, 담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네, 맞아요. 양치기는 화를 내죠. 담배가 없다면 아무것도 없는 거라고. 저는 이 소설을 읽고서 계속 생각했어요. 내게 담배 같은 건 뭘까? 그리고 그 답을 알고 싶어 여기 크레타에 온 거예요."

 



『그리스인 조르바』를 처음 읽었을 당시, 담배가 없냐며 호통치는 양치기의 목소리가 소설 밖으로 뚫고 나오는 것 같았다. 마치, 그 말을 나에게 하는 듯했으니까. 그 어떤 것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었다. 담배 대신 나에게는 이것이 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날은 그것이 그림인 것 같았다. 기억이 없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해온 것이 그림인데, 이 정도면 담배에 버금가는 것 아닐까? 생각을 더 해보니, 그림이 아닌 글인 것 같기도 했다. 단 하루도 읽고 쓰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날을 보내던 때였다. 누군가 재능이란 그것을 얼마나 뛰어나게 하느냐가 아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것이라고 일러준 적이 있었다. 그림과 글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담배는 재능을 말하는 것일까? 아,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작은 면을 너무 오래 보고 있으면, 소설이 큰 맥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상실하기 쉽다. 나는 그런 관점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시 짚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야기 속 화자는 카잔차키스 자신이기도 하다. 그는 일평생 자유를 열망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나고 자랐던 크레타는 과거 오스만 제국에 의해 지배를 받았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 미할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다 싸늘한 시신이 된 이들을 어린 소년의 카잔차키스에게 보여줬다. 자유를 얻기 위해 싸우다 죽음에 이르렀던 이들을. 아마 그 시절부터 자유는 그를 모질게 따라다녔을 것이다. 인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혹은 죽음을 두렵지 않게 하는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함께.


그리스도를 믿었던 카잔차키스는 신을 사랑한 만큼 의심했다. 나는 이것이 그가 자유로 가기 위한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지탱하는 것을 향해 마음껏 의심하고 질문하는 것. 운명이 이끄는 대로 살던 그는 자신의 일상을 잠시 뒤로 한 채, 아토스 산에 올랐고 사나이 사막을 걸었다. 신과 싸우는 과정은 그를 신과 멀어지게 하기는커녕 더욱 가까이 다가가도록 했다. 그는 신을 이전보다 깊게 사랑할 수 있었으며, 이는 곧 내면에 자리 잡은 신과 만나는 길로 이어졌다. 바로, 부처를 만난 것이었다. 인간에게 원하는 마음을 중단하라고 말하는 부처. 카잔차키스는 부처가 말하는 '완벽한 없음'에 자유를 느꼈다. 그러나, 삶을 거부하는 부처의 메시지에 흠뻑 빠져들었을 때, 지극히 인간적인 삶을 사는 인물이 나타났다. 그가 조르바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긴 인물로 오디세우스, 예수, 부처와 함께 조르바를 꼽는다. 우리가 소설 속 인물로 알고 있는 조르바는 그렇다, 실존 인물이다. 크레타의 갈탄 광산 사업을 하던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현장 책임자로 고용하며 만나게 되었다. 조르바는 부처가 말하는 없음에 항의한다. 없음이라니! 와인도, 춤도, 산투리도 없이? 그게 바로 환상이라고 말하는 카잔차키스의 주장에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것들이 없다면, 삶은 의미가 없다고!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조르바에게 부처의 그 어떤 말도 유효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을 자유라고 정의한다. 땀 흘려가며 일한 갈탄 광산을 날려버릴 자유. 고루한 말이 아닌 춤으로 자신을 표현할 자유. 누군가 간곡히 청하는 산투리 연주에 응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신에게 대항하고 부처의 사상을 부정할 자유.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제가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모험(Vios kai politia tou Alexi Zormpa)』임을 생각했을 때, 이 소설은 카잔차키스가 보고 듣고 느낀 조르바의 삶 그 자체를 옮겨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화자를 통해 자신이 지녔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풀어낸 이야기이다. 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았고, 신과 싸우고, 내면의 신을 찾으며 신과 합일되는 과정을 거쳤지만 도달할 수 없었던 것. 마침내 신이 아닌 지극히 인간적인 삶에서 발견한 자유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소설 속 인물이 화자에게 던지는 질문을 자유와 연결시킬 필요가 있다. 


양치기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담배가 있냐고 묻는 질문을 말이다. 담배를 자유로 바꿔보았다. 당신에게 자유가 있냐고 묻는 질문은 화자를 지나쳐 나에게 성큼 다가왔다. 나에게 자유란? 카잔차키스가 일평생을 들여 도달한 질문과 답을 내가 단번에 내릴 수 있을까. 평생 동안 답을 끝내 얻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질문을 계속 지니기로 마음먹었다. 이것 또한 나의 자유이기에.

 



"그래서, 답을 알았나요?"

"글쎄요. 아직 과정에 있어요. 답은 잠시 미뤄두려고요. 그래도 어느 정도 힌트는 얻은 것 같아요."


나는 도서관에 수북이 쌓여 있는 카잔차키스의 책들을 바라봤다. 저 중에 『뱀과 백합』이 있겠지. 어느 날, 뚜렷한 목적 없이 카잔차키스는 펜을 들어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은 아테네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그가 처음 발표한 글이었다. 종이라는 너른 대지 위에 그는 펜을 들어 처음으로 신의 영역인 창조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이 또한 그가 발견한 자유였으리라.


나는 집으로 돌아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을 알 수 있었다. 글을 써야겠다고. 그 다짐을 내 안의 자유가 동의했다.

 

이라클리온 공립 도서관에서 만난 카잔차키스와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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