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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신의 마음이 닿기를

크노소스 궁전을 둘러보고 나와 출입구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다. 직원에게 건네받은 메뉴에서 스터프드 베지터블스와 멜론 주스를 주문하고 노트와 펜을 넣어둔 주머니에서 엽서 몇 장을 꺼냈다. 지난밤, 이라클리온 중앙시장에서 산 것이었다. 그리스의 자연을 그래픽 스타일로 풀어낸 일러스트레이션이 담긴 엽서에 'ㄱㄹ'이라는 초성으로 편지를 썼다. 이대 앞, 어느 책방에서 알게 되어 연락하고 지내는 성은 님을 위한 것이었다. 대게 편지를 쓸 사람을 떠올리면, 그 사람에게 보낼 초성이 단번에 떠올랐다. 편지의 주제가 된 초성 덕분에 쓰는 것도 꽤나 수월했다.


다음 엽서는 크레타 섬의 철자, 'CRETA'를 꾸며놓은 일러스트레이션이 담겨 있었다. 진우 오빠에게 보낼 엽서였다. 얼마 전, 오빠는 딸을 출산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축하의 마음을 담아 엽서를 쓰고 싶었던 터라 그에 맞는 초성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ㅊㅂ'. 초성을 고르는 것까지는 막힘이 없었는데, 또 다른 숙제 앞에서 망설여졌다. 대체 어떤 그림을 그린단 말인가.


- 저요, 저요! 그림엽서 보내주세요!


진우오빠가 '배송 사고를 기대하며 전하는 편지' 이벤트를 신청하며 장난스럽게 내 건 요구사항이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만난 동기이지만, 회사 일에 대한 푸념 보다 회사 밖의 이야기를 하며 친해진 사이이다. 이를테면, 평소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지 말이다. 그렇다 보니, 오빠에게 나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디자이너가 아닌 그림 그리는 은영이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래, 이 양반이 그림을 보내달라고 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하지.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나처럼 미술 전공자라면 열이면 열이 이런 경험을 해보았을 것이다. 미술을 전공했다고? 오, 그럼 이거 그려 봐. 미술이 기계적인 행위가 아닌데도 툭하면 자꾸만 뭘 그려보라고 한다. 그런 요청에 대부분의 미술 전공자는 잘 그려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이 야속한 인간! 알고 지낸 세월이 있으니 봐준다는 심정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ㅊㅂ'이라는 자음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ㅊㅂ'을 떠올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생명의 탄생만큼 경이로운 신의 일이 또 있을까.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하는 성서가 진화론에 근거하여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공격에도 신을 믿는 마음이 살아남은 이유는 창조가 매 순간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빠의 딸아이가 이 세상의 빛을 마주한 것처럼.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은 적이 있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것이 파괴되는 시대에 그 일은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듯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일에만 열중하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땅에 도토리 십만 개를 심었지만, 그 십만 개가 모두 나무가 되지는 못했다. 짐승들의 먹이가 되기도 하고 열악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나무는 성장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던 허허벌판에 만 그루의 나무가 자라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만 그루의 나무는 훗날 셀 수 없는 나무가 자라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를 두고 그는 결코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며 자만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노력을 기울이고 그 후의 일은 온전히 신에게 맡기 듯 결과에 영향받지 않았다. 그저, 계속해서 나무 심는 일을 해 나갈 뿐이었다. 수십 년 후, 그 지역이 전쟁으로 인해 갈 곳을 잃은 이들이 쉴 수 있는 숲이 될 때까지 말이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통해 선을 행하는 이의 이야기로 알려진 이 소설에서 나는 인간이 지녀야 하는 겸허함을 동시에 발견했다. 소설에서 등장하는 전쟁은 누가 뭐라 할 것 없이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창조와 반대편에 있는 파괴를 상징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인간의 파괴는 과연 전쟁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인류는 이제까지 파괴를 위한 수많은 도구와 이념을 만들어 냈다흔히 신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창조와 파괴 중 인간이 더 쉽게 재현할 수 있는 일은 파괴에 가깝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이다. 반면에 창조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오롯이 실현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소설 속 화자는 엘제아르 부피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는 하느님이 보내 준 일꾼이었다. 나는 그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땅을 나무로 덮을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나무를 심는 행위가 창조의 시작이었지만, 그를 신에 버금가는 존재로 칭하지 않고 신의 일꾼으로 표현했다. 황무지에 심어진 도토리가 다른 생명들을 불러 모으는 숲이 되는 과정 즉, 창조가 창조를 낳는 영역에 신의 자리를 남겨둔 표현이라고 나는 해석했다.


그가 심은 도토리가 숲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는가. 엘제아르 부피에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마치 숲이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확신한 것은 창조의 힘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그의 확신에 신은 '축복'으로 응답한 것이라고. 인간의 선함으로 행해진 창조의 기쁨을 나를 넘어선 타 존재와 함께 누리도록 신이 그를 도운 것이라고 말이다나는 이런 이유로 신의 존재를 믿고 있다.

 



오랜 고민 끝에 진우 오빠에게 그리스의 올리브 가지를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리스를 여행하며 가장 신의 축복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올리브 나무였다. 식탁 위에 올라오는 올리브가 아니어도 그리스 어느 곳이든 걷기만 하면 곳곳에 가로수로 자리 잡은 올리브 나무를 흔히 볼 수 있다. 연중 내내 따듯하고 여름의 건조한 지중해성 기후는 올리브 나무가 자리기 좋은 최적의 생육 조건이다. 한번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오랜 생을 지속하는 올리브 나무는 세월에 따라 곁가지를 충실하게 내며 풍성하게 자란다. 구름 한 점 없는 여름,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탐스럽게 열리는 열매는 가정마다 훌륭한 식재료가 되어준다. 그러니, 어딜 가나 쉬고 먹을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 올리브 나무인 셈이다. 이것을 그리스에 내려진 신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기에도 최적인 스태들러 피그먼트 라이너 0.1을 꺼냈다. 올리브 열매가 탐스럽게 열린 가지를 하나 그렸다. 열매는 세 개. 오빠와 오빠의 반려자 그리고 둘 사이에서 얼마 전 태어난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를 담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시작하는 편지를 썼다.


- 오빠에게 그리스의 올리브를 전해. 그리스의 본토와 수많은 섬을 수놓는 올리브 나무를 보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에게 신이 준 ㅊㅂ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리스 땅에 내린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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