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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이유는 없음

수니온 곶의 포세이돈 신전에서 보름달을 보는 것과 크레타섬에서 카잔차키스의 흔적을 찾는, 이 두 가지의 여행의 이유를 달성하고 나니 여행은 보다 간결해졌다. 다른 모든 것은 마음이 이끄는 대로 말하자면, 조르바처럼 선택하고 행동했다. 


이라클리온을 떠난 페리는 산토리니에 정박했다. 나는 갑판 위에 올라 밟아보지 않은 섬, 산토리니를 눈으로 담았다. 다음 행선지의 후보에 산토리니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리스 여행을 고려할 때, 많은 여행자들이 대표적으로 염두에 두는 곳이기에 시간과 여건이 허락한다면 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배낭에 산토리니에 가게 되면 입을 생각으로 하얀 블라우스와 긴 기장의 새파란 치마도 챙겨 온 것이지 않은가! 그러나, 영 내키지 않았다. 그저, 유명한 곳이라는 이유 외에 산토리니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산토리니를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쳤다. 페리가 이오스 섬을 경유한 후 낙소스에 다다랐을 때, 나는 짐칸에 실어두었던 배낭을 찾아 내렸다.


왜 낙소스에 왔느냐, 하면 그 역시 적절한 답을 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특별한 이유가 없었으니까.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읽으며 낙소스라는 섬 이름에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카잔차키스가 한 때 낙소스에 살았다는 사실도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수니온에서 지나치게 많이 걷다가 고관절로 꽤나 고생을 한 탓에 요가가 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해변에서 요가 수업을 진행하는 스튜디오를 발견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쭉 관심이 있던 신인 데메테르를 기리는 신전이 낙소스에 있다는 것도, 최근 관심이 생긴 디오니소스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도 낙소스라고 하니, 궁금한 섬이 된 것이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이유들이 쌓여 낙소스에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앗, 분명 낙소스로 온 것에 대해 이유가 없음을 주장하려는 글이었는데. 적당히 넘어가주길 바란다. 하하하.


켜켜이 쌓인 대수롭지 않음으로 대수로운 여정이 될 뻔한 것을 덜어준 것은 다름 아닌 낙소스였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허기가 지는 바람에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올리브 한 접시와 함께 그리스 전통 음식인 파바를 주문했다. 해변이 보이는 발코니에 자리 잡았는데 지중해 미풍으로 잔잔하게 물결치는 에게해를 바라보다 저 파고만큼만 여행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뼘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저 물결의 높이에 공명할 수 있다면, 이번 낙소스 여행은 족하리라는 확신. 때마침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이가 음식을 내왔다. 생소한 파바를 빵에 찍어 먹어보았다. 담백한 맛이었다. 낙소스의 훌륭한 첫 끼였다.

 



해가 질 무렵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아폴론 신전이었다. 이곳에 오니, 이제야 올드타운을 산책할 때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밤에 가보라는 호텔 직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낮에 올드타운을 갔었다. 이유야 뭐, 딱히 할 것이 없었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걷지 않아 밤에 가보라는 말을 납득하기 시작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햇볕의 열기를 식히러 다들 해변으로 나갔는지 거리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찾는 이가 없으니 상점도 웬만해선 모두 문을 걸어 잠갔다. 관광객을 현혹시킬 분위기는 전혀 아니었으나, 나라는 관광객은 그 거리가 마음에 들었다. 새하얀 벽에 그리스의 색으로 칠해진 문과 창틀. 그리고 오래된 건물을 부겐빌레아와 능소화가 덧칠하고 있었다. 낯선 언어로 그리고 쓰인 그래피티에선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좁은 언덕길을 고양이들이 기척도 없이 다녔다. 사람이 있으나 없으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생명을 보고 있자니, 왠지 잃어버린 여유를 찾는 기분이었다. 산토리니나 미코노스에는 없을 낙소스가 지닌 이 밀도가 좋았다. 천천히 걸어 올라선 올드타운에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잘게 빛나는 윤슬에 오래도록 시선이 머물렀다.


사람이 모여든 이곳 아폴론 신전의 밀도가 불편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일몰의 명소답게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든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서로의 시야에 아폴론 신전과 태양이 방해되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감이 유지되고 있었다. 그 거리감은 악사들 사이에도 존재했다. 아폴론은 태양의 신이기도 하지만, 음악의 신이기도 하지 않는가. 그를 기리는 사원답게 악사들이 다른 곳과 달리 제법 모여 있었는데 그럼에도 음악을 듣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정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걷기만 해도 채널을 옮겨 다니며 다른 음악을 듣는 것이 가능했다.


나는 사원을 등지고 어느 바위 위에 앉았다. 고르지 않은 면 때문에 앉기 불편했지만, 일몰을 보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조금씩 멀어지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금 떠나보내는 이 태양은 다음날 그리스를 비춰주기 전에 한국을 먼저 밝혀주겠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국으로 향하는 태양에게 내 마음을 실어 보내기로 했다. 일몰은 내일을 기약하는 마음을 들게 한다. 그 마음을 담아 한국에도 다음을 약속했다.


저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괜한 궁금증과 동시에 동질감 같은 것을 느꼈다. 해가 넘어가는 순간,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고 박수를 쳤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태양은 떠났지만, 일몰의 기쁨을 나누며 마냥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이 섬에서는 매일 일몰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 없이 찾아온 낙소스에서 발견한 첫 여행의 이유였다.

 

태양이 떠난 후, 낙소스의 올드타운에서 내려다본 아폴론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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