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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나의 이름은. Part 2.

객실 테라스에서 아침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옆 건물의 벽 한쪽을 그림 그리던 부겐빌레아의 꽃잎이 날아들었다. 몇 해 전, 단풍 대신 이 꽃을 보며 가을을 보냈던 날들도 함께 날아들었다.

 



몰타에서 보냈던 그 해 가을, 나는 '해나'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해나는 내가 성본변경을 하며 바꿀 이름으로 스스로 지은 것이었다. 엄마의 성을 쓰고 싶다는 말에 한숨을 내뱉듯 엄마는 말했다. 네 이름은 내가 짓고 싶었어. 나는 성을 바꾸고 싶다고 말한 것인데 난데없이 엄마가 이름 이야기를 꺼내 당황스러웠다. 은영이라는 내 이름을 삼촌이 지은 거란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아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내 이름에 엄마의 한숨이 서려있을 줄이야. 엄마의 신혼 생활은 지독한 시집살이의 연속이었다. 엄마는 자신이 낳게 될 첫 아이의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엄마의 의견은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객식구의 말을 누가 들어준단 말인가. 엄마는 그 실망감에 나에게 이름 붙이고 싶어 했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으로 그 일을 마무리했다. 그런 탓에 내 이름이 될 뻔한 이름을 나는 영영 알 수 없게 되었다. 애초에 갖지 않았던 것을 잃어버린, 이해하기 어려운 상실감이 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나는 이름도 함께 바꾸는 것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름에 그다지 애착이 없는 편이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최은영이라는 친구와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내며 나만이 지닐 수 있는 개성을 담아내지 못하는 이름 같아서였을까. 없는 것이나 매한가지인 자음 'ㅇ'이 유난히 많은 내 이름을 발음을 하고 나면,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약한 구석을 들키는 것 같아서였을까. 그보다 은영이라는 이름 대신 친구들이 불러주는 별명이 많았던 나는 공적인 서류를 작성할 때 쓰는 '최은영'이라는 이름 석자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는 것도 제법 그럴듯한 이유였다. 누군가 나를 최은영, 은영아, 은영 님, 은영 씨라고 부른다는 것은 즉, 그가 나와 친밀하지 않다는 증거에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서른 중반이 되도록 이름 하나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대체 뭐람. 내 이름은 불릴 때마다 항상 나를 비껴가는 낯섦만 남기곤 했다. 어쩌면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인 줄도 모른다. 이 이름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한 것임을. 나는 그렇게 내 이름을 밀어냈다.


"이미셸? 뼛속까지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내가?"

"좀 그런가? 나는 미셸이 좋던데. 디자이너 미셸."


본격적으로 이름 바꾸기 모드로 돌입했다. 하루는 온종일 엄마와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영어 이름에 엄마는 특별함을 느꼈던 것일까. 미셸로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엄마의 파격적인 제안에 웃음이 났다. 엄마는 나의 직업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했는데, 스마트폰에 나를 '디자이너 은영'이라고 저장을 해 둘 정도였다. 엄마의 스마트폰에 '디자이너 미셸'이라는 이름이 저장될 생각을 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가 보면 유학파인 줄 알겠어!


"그보다 나는 'ㅎ'이 시작하는 이름을 갖고 싶어."

"왜?"

"그야, 나 빼고 다 'ㅎ'으로 시작하는 이름이잖아."


'ㅇ'보다 옅은 존재감을 지닌 'ㅎ'. 나의 두 동생은 'ㅎ'으로 시작하는 이름을 쓰고 있다. 내가 엄마의 성인 '이'를 쓰게 되면 우리 셋을 연결하던 '최'가 사라질 테니, 대신 'ㅎ'으로 연결을 유지하고 싶었달까. 두 동생의 의견은 묻지 않았지만, 나름 훌륭한 근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해인은 어때. 해인."

"아. 너무 수녀님 이름이다."


나는 엄마의 제안을 또다시 거절했다. 훌륭하신 분의 이름은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그렇게 살 자신이 없어서. 계속된 반려에 엄마는 두 손 두 발을 들었고 결국 혼자 고민을 해야 했다. 한글 이름이 어떨까. 예전부터 한글 이름을 지닌 사람이 좋아 보였으니까. 'ㅎ'으로 시작하는 한글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해나였다. 해나는 '해가 나다'라는 의미를 지닌 우리말이다. 달을 좋아하는 만큼 해를 좋아하는 나는 여행을 다니면 어디로 해가 뜨고 지는지 꼭 확인하곤 한다. 특히, 일출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다. 떠오르는 태양의 장엄함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 살아있음에 감사를 느낀다. 이렇듯 해가 나는 순간을 동경하는 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더불어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담았다. 지난한 어둠의 끝에 빛을 내려주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게 꼭 염색약 이름 같아서 별로다."

"하하하. 그렇지. 그렇긴 한데, 헤나가 아니라 해나야. 우리나라 말로 '해가 나다'라는, 그러니까 일출이라는 뜻이야."


탐탁지 않아 하던 엄마는 늘 그랬던 것처럼 끝내 동의했다. 우리 모녀의 의사결정 방식은 항상 그랬다. 자신의 일에 대해선 그 누구보다 당사자가 결정권을 갖고 다른 한쪽은 동의해 주는 방식. 이번 안건은 나와 관련된 것이니 내가 결정을 했고, 엄마의 합의 과정을 거쳐 가결됐다. 그렇게 나는 '이해나'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었다. 당장 반년 간 해외여행을 앞둔 나는 복잡한 행정 절차 대신 숙려기간을 도입했다. 여행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이해나로 소개하기로 한 것이었다.

 


 

육 개월의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렀던 몰타에서였다. 어학원 생활을 시작한 첫 주 차, 함께 수업을 듣는 여러 국적의 클래스 메이트와 함께 한인 식당에서 주말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내게 궁금한 것이 있다고 했다. 해나라는 이름이 한국이름 같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구권에도 해나라는 이름이 존재한다. 성서에 등장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서 온 이름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한나는 내가 해나라는 이름을 선택할 때, 하느님을 믿는 엄마의 동의를 얻게 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본래 내 이름 은영의 뜻은 '은혜를 비추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애정이 없는 이름이라 하더라도 이미 삼십 년이 넘게 불린 이름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도 해나라는 이름은 매우 적절했다.


그러나, 친구들의 궁금증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이미 수십 년 쓴 이름을 바꾼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나 보다.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의 시작은 성을 바꾸려는 시도와 직결되었기에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 해나의 아버지가 속상해하시겠다며 내가 하는 말을 비집고 들어왔다. 정상가족의 틀은 몰타의 인터내셔널 테이블에서도 존재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셨거든.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이라곤 세 손가락 안에 겨우 꼽을 정도로 기억하지 못하는 내게 '최'라는 성은 그의 존재를 겨우 인지하는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때, 홀로 나를 키워낸 엄마의 영향을 빼놓을 수가 없음에도 나는 이 씨가 아닌 최 씨 사람이었다. 은영이라고 불릴 때보다 최은영이라고 불릴 때 스스로 어색함을 지울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었을 터였다.


브라질과 콜롬비아에서 온 친구들은 자신들의 풀 네임을 이야기해 주었다. 모부의 성을 모두 이름에 표기하는 것이 자신이 사는 나라의 원칙이라고 했다. 자신들은 고민해보지 못했을 일에 해나가 고민하느라 고생했겠다며 눈을 맞추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게. 겨우 이름일 뿐인데. 이름 하나 가지고 이렇게 마음을 써야 한다니.


그러나, 고생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글로벌 무대(?)에서 이름 청문회까지 치렀건만, 이미 성인이 된 경우 성본 변경이 어렵다는 변호사의 의견이 긴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의 재혼으로 새아버지와 성이 다른 비성년자 혹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한부모 가정의 비성년인 경우에는 성본 변경이 가능하다고 했다. 이미 성인이 된 나의 경우는 그 혼란스러운 시기를 지난 것으로 간주하기에 해당사항이 없었다. 게다가 가족법은 질서가 원칙이라 형제자매가 있는 경우 모두 함께 성본 변경이 필요하다고 했다. 첫째 동생은 이미 결혼을 한 상황이었다. 대대적인 공사를 함께 하겠냐고 질문을 던지기 어려웠다.


아버지의 딸이 아닌 어머니의 딸로 자란 이가 어머니의 성을 따르겠다는 의지를 우리나라 제도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셈이다.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되었음에도 아직도 사회 곳곳에 부성주의 원칙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말은 즉,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의 모계를 잇고자 성본을 변경한 시선의 셋째인 명은이를 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라는 것이다. 가부장제 틀을 벗어나지 못한 성본 변경 절차 앞에 이해나는 갈 곳을 잃었다. 그저, 그 시기에 잠깐 불리고 만 이름이 된 채로.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기 전, 여건이 허락된다면 몰타를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몰타도 지중해에 있으니, 그리 멀지 않았지만, 예상보다 그리스 여정이 짧게 조정되었고 몰타는 다음으로 접어두어야 했다.


그러나, 접어둔 마음은 부겐빌레아처럼 불쑥 피어났다. 그리스를 여행하다 보면 몰타가 생각나는 일들이 많았으니까. 특히, 여기 낙소스가 그랬다. 지중해의 섬은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일까. 누군가 이름을 물으면, 불현듯 해나가 잠시 생각나기도 했다. 내가 다시 몰타를 간다면, 나는 다시 해나가 될 수 있을까.


백일 가량 머물며 원 없이 보았던 몰타의 부겐빌레아 꽃잎 한 장을 챙겨 오지 않아 아쉬웠던 일이 생각났다. 나는 테라스에 날아든 꽃잎을 빈 틴 케이스에 넣어두었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문득 지중해가, 그리스가, 몰타가 그리고 해나가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볼 수 있게 말이다.

 

테라스에 날아든 부겐빌레아 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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