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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구팔구 팔레트 Sep 29. 2023

여행자의 이별

"마리아나."

"왔어요? 잠시만 기다려요. 이따가 오기로 한 손님이 있어서. 이것만 마저 하고요."


나는 마리아나의 꽃집을 다시 찾았다. 이라클리온에 온 첫날, 나는 이곳에서 꽃다발 하나를 샀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지에 둘 꽃이라는 말에 마리아나는 그의 취향을 알고 있다면서 들꽃으로 다발을 만들어주었다. 불필요한 포장도 없이 노끈으로 튼튼하게 묶어주는 것이 다였다. 나는 카잔차키스의 취향을 모르지만, 그가 쓴 소설과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 〈카잔자키스〉를 보았을 때, 마리아나가 만들어준 꽃다발은 영락없이 카잔차키스의 위한 것이었다. 꽃다발을 들고 나서는 나를 마리아나가 불러 세웠다. 이라클리온에 언제까지 있을 예정이냐고, 떠나기 전에 라키를 마시러 다시 오라고 했다. 이라클리온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되어서야 마리아나를 찾았다. 그의 말마따나 함께 라키 한 잔을 기울이기 위해서였다.

 

카잔차키스를 위한 꽃다발

 

예약 손님을 위한 꽃다발을 완성하고 나서 마리아나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잠시 후, 누군가 라키를 담은 유리병을 들고 나타났다. 라키를 리필해서 마신다고? 나는 한국에서 소모품에 속하는 생활용품과 식재료를 구매할 때, 리필 스테이션을 이용하는 데도 그 광경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막걸리를 리필해서 판매하는 곳도 알고는 있지만, 접근성이 떨어져서 술을 리필해서 마셔볼 엄두를 내보지 못하기도 했다. 반면, 여기는 리필 문화가 생활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화 한 번이면 가능하다니! 마리아나는 라키가 담긴 술병을 건네받으며, 빈 병을 그에게 주었다.


"라키 마셔봤어요?"

"이스탄불에서요. 엘리라는 튀르키예인 친구가 있거든요. 그 덕에 마셔봤죠."

"재미있네요. 어쨌거나 그리스 라키는 처음이겠군요. 자, 받아요."


아니스 향이 나는 것이라면 술이든 음식이든 그다지 선호하지 않지만, 늘 예외는 있는 법이다. 특히, 그 경우가 여행이라면 더더욱. 나는 마리아나가 따라주는 라키를 기꺼이 받았다. 술잔을 부딪히기 전에 마리아나가 물었다. 한국에서는 이럴 때 뭐라고 말하냐고. 


"건배. 건배라고 해요. 그리스에서는요?"

"야마스라고 말하면 돼요."


나는 야마스를 이미 알고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에서 만난 영국인들의 부탁에 사진을 찍어주는데 그들은 내가 외치는 원, 투, 쓰리에 야마스로 입을 모았다.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더니, 그들 중 하나가 사진 찍을 때 치즈라는 영어 대신 그리스어를 쓸 뿐이라고 했다. 야마스의 제대로 된 용처가 술자리라는 것은 설명을 듣지 못했는데, 그리스인인 마리아나를 통해 확실하게 알게 된 셈이었다. 얼떨결에 궁금증은 해결됐고, 새로 알게 된 말을 적재적소에 쓸 일만 남았다. 술잔을 부딪혔다. 나는 주저 없이 야마스를 외쳤으나, 아뿔싸 마리아나는 건배를 외쳤다. 우리는 이 불협화음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다음부터는 화음을 맞추기로 했다. 번갈아가며 한 번은 건배를, 한 번은 야마스를 외치며 라키를 담은 술잔을 계속 비워 갔다.


마리아나는 자신의 일상을 새로운 시선으로 여행하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다. 이를테면, 이들의 일상 속에서 여전히 살아있는 카잔차키스를 내가 만나기 위해 온 것처럼 말이다. 카잔차키스의 묘지에 둘 꽃을 주저 없이 만들어주는 당신, 마리아나처럼 카잔차키스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이라클리온이다. 카잔차키스의 문학을 원서로 보고 싶었단 말에 사서들은 처음 본 이방인을 위해 번역가를 자처했다. 카잔차키스가 어릴 적 살았던 마을, 미르티아로 가기 위한 교통편을 찾아보느라 곤욕을 치르는 나를 위해 버스터미널 창구 직원은 온 직원을 만나고 다니며 그곳으로 갈 표를 마련해 주었다. 이렇듯 먼 나라에서부터 카잔차키스를 만나러 온 여행자를 위해 이라클리온의 사람들은 자신의 일처럼 나섰다. 마리아나의 질문과 달리,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는지 여행자는 역으로 묻고 싶었다. 카잔차키스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때였다. 선명한 핑크색 미니 원피스를 입은 금발의 여자가 나타났다. 남의 업장에서 술을 마시던 나는 경직되었다. 손님이 보면 불편해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그러나, 마리아나는 그 여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진한 포옹을 했다. 


"불라! 여기 인사해. 한국에서 카잔차키스를 보러 온 은영이야."

"오, 반가워요. 불라예요."

"아 반가워요. 한국에서 왔어요."

"은영. 여기, 이 술잔 불라가 선물해 준 거예요."

"아, 정말요? 어쩐지 평범해 보이지 않더라니! 정말 예쁜 술잔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마리아나는 불라에게 라키를 따라주었다. 그리고 건배를 가르쳐주었다. 겨우 한 명이 술자리에 늘어난 것일 뿐인데, 모아 외치는 건배 소리는 훨씬 크게 들렸다. 불라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미 라키 몇 잔에 얼큰하게 달아오른 우리 둘을 위해 흥을 맞춰주었다. 재미있는 것은 마리아나가 이 일대에서 인싸로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연이어 마리아나의 친구들이 계속 등장했고 그때마다 라키는 채워졌으며 건배 소리는 더욱 커졌다. 마리아나는 어김없이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했다. 여기, 이 친구는 카잔차키스를 보러 크레타에 온 은영이야. 이 친구가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카잔차키스를 알고 난 후로 자신의 삶이 깊어졌대. 난 그 말이 정말 좋아! 마리아나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나를 소개해준 말이 마음에 들었다.


얼마 전, 받은 의사의 소견으로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채워지는 라키마다 남김없이 모두 비워냈다. 기분이 좋았다. 좋은 기분만큼 밤은 깊어졌고, 이제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리아나의 친구들도 혼자 있을 남편 때문에(아니! 남편이 집에서 아내를 기다리는 것은 만국 공통의 문화인 것인가.) 가봐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엄마보다 대여섯 살 정도밖에 어리지 않는 이들을 꼭 안아주며 잠시 그리운 품을 생각했다.


마리아나는 방금까지 내가 라키를 부어 마셨던 잔을 씻지도 않은 채 싸기 시작했다. 불라에게 이미 허락을 받았다는 마리아나는 선물로 이 잔을 내게 주겠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가서 고스란히 남은 라키 향을 맡으며 이날을 추억해 달라고 말이다.


"이라클리온에 언제든 다시 와요. 당신은 이제 여기에 친구도 있는 셈이니까."


마리아나의 작별 인사에 나는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호스텔에 나서기 전, 이틀 밤을 함께 보낸 여행자에게 했던 나의 인사말 "이따 봐.(See you.)"에 돌아온 말은 그가 이곳을 떠나 크레타의 서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여태 이름도 국적도 그 아무것도 묻지 않아 알지 못하는 이였는데도 괜히 마음이 쓰였다. 밤마다 조용히 침대 위에서 책을 읽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그랬을까. 혹은 오며 가며 마주칠 때마다 따듯하게 짓던 미소가 좋았던 것일까. 왠지 모르게 쓸쓸했던 아침을 위로받은 밤의 작별이었다.


"마리아나, 오늘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마리아나는 나를 힘껏 안아줬다.

 



이 밤이 지나면 아침 일찍 낙소스로 향하는 페리를 타야 했기에 미리 체크아웃을 해야 했다. 호스텔 리셉션을 들렸다. 호스트는 그간 여행은 잘 보냈는지, 지내는 동안 불편한 것은 없었는지 으레 하는 질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나 역시 이곳이 좋았다는 말을 여러 다른 문장으로 대답했다. 


"그리스는 얼마나 여행해요?"

"대략 2주 정도요. 이제 반 조금 넘은 셈이에요."


이츠 어바웃 투 윅스.(It's about 2 weeks.) 대답을 하면서 15일의 그리스 여정을 약 2주로 퉁쳐서 말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우리나라는 보통 15일을 보름이라고 말하니까, 그에 맞는 영단어가 있으면 좋을 텐데. 보름의 그리스 여정을 영어로 말하는 순간 이미지는 날아가고 피프틴 데이즈(15 days) 혹은 어바웃 투 윅스(about 2 weeks)라는 건조한 숫자만 남아버리는 느낌이었다. 하프 먼스(half month)도 우리나라의 보름이 주는 어감과 상반된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고. 뭐라고 말하면 좋을까.


대화를 하다 말고 보름이라는 어감을 어떻게 옮겨 표현하면 좋을지 고뇌에 빠진 내게 호스트는 카드 한 장을 내밀었다. 호스텔 주소가 적힌 카드였다. 이게 뭐지? 하며 앞 뒤로 카드를 살피고 있을 때, 호스트는 말했다.


"편지해요."

 



라키를 마셨던 술잔과 호스텔 주소가 적힌 카드를 들고 벽을 노란으로 칠한 객실에 들어섰다. 비었던 침대는 벌써 다른 여행자로 채워져 있었고 나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어쩐지 낯설었지만, 반갑게 인사했다. 여행자의 미덕은 낯선 이와 하는 인사에서 오는 법이니까. 그는 내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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