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9. 사리아 → 뽀르또마린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사리아를 깨우며 우리는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가 사리아에서 걸어갈 뽀르또마린까지 22km 밖에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공립 알베르게에 묵는 것을 우선으로 하자고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 공립 알베르게는 예약이 불가능하기에 선착순으로 침대를 차지해야 했다. 엄마는 낮보다 아침에 걷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 다행히 일찍 나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우리는 걸음도 제법 빠른 편이라 자신 있게 길을 나설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사람들이 더 이상 앞으로 전진하지 않고 정체하는 구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바로 앞에 100km 표지석이 있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순례자들이 그 표지석과 함께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12년 전 100km 표지석을 마주했을 때는 주변에 사람이 하나 없었는데 계절이 달라서인지 사리아부터 순례자가 증가한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긴장감을 추스리기 어려운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엄마와 나를 비롯한 우리 일행도 다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달라진 것은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표지석의 모습도 놓인 위치도 달라져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정갈한 광경이었다.
프란체스카는 100km 표지석을 보는 순간을 수도 없이 상상했다고 말했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닿는 그 순간은 아직 먼 일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그의 눈에는 잘게 이는 떨림이 비쳤다.
멀리서 목적지인 뽀르또마린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곁에서 걷고 있던 모니카에게 말을 걸었다. 모니카는 최근 프랑스길을 잠시 벗어나 다른 길을 걷다가 지난밤 사리아로 돌아온 터였다.
"지난번에 까미노를 걸을 때는 뽀르또마린에서 점심 식사만 하고 떠났어. 그때 함께 걷는 친구들이랑 곤사르까지 가기로 했거든. 근데 그게 좀 아쉬웠어."
"왜?"
"멀리서 본 뽀르또마린이 정말 예뻤거든.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면 굽이 진 강 건너로 언덕 위의 마을이 보이는데 그게 꼭 섬마을 같이 멋졌어. 그때는 다음 까미노를 생각해보지 않았는데도 다시 온다면 여기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
"그다음이 바로 오늘이구나."
"응. 그게 바로 오늘이야."
처음 뽀르또마린을 본 날은 무척 흐린 날이었다. 그럼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한 곳이었다. 파란 하늘아래 마을을 보았더라면 정말 멋지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까미노는 그 바람마저 들어주었다.
나는 두 어머니를 챙기며 강을 가르는 다리를 건너 뽀르또마린에 닿았다. 앞서 가던 프란체스카와 마르티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지 이미 꽤 되었던 터였다. 우리는 지체 없이 공립 알베르게로 향했다. 그 길에서 담배를 사러 띠엔다(Tienda, '상점'의 스페인어)에 가는 마르티나를 만났다.
"알베르게로 곧장 가! 줄을 서야 해. 그 순서대로 체크인을 하게 될 거야. 난 거기에 배낭을 두고 왔어."
서둘러 가라는 마르티나의 말에 던과 엄마 그리고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알베르게의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순례자들이 만들어놓은 줄의 가장 끝에서 우리는 배낭을 내려놓고 슬리퍼를 갈아 신었다. 그때 먼저 도착해 있던 프란체스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은영, 이따 체크인하고 나서 네 어머니께 내 침대를 줄게. 아무래도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프란체스카는 혹여나 우리 엄마가 아래층 침대를 쓰지 못할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나는 그 말에 슬리퍼를 질질 끌며 줄의 가장 앞 쪽으로 갔다. 대체 언제 도착했는지 스페인 순례자 이삭과 대니가 줄의 첫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분명 아침에 바르바델로의 같은 바에서 아침 식사를 한 것 같은데! 그들이 말도 안 되게 빠르거나 그들과 우리 사이에 얼마 되지 않는 시차로 도착한 순례자들이 무척 많았거나 둘 중 하나였을 터였다.
지금 넋 놓고 감탄할 때가 아니지.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이삭과 대니가 있는 곳부터 던과 엄마가 있는 곳까지 순례자가 몇 명이나 있는지 수를 세보았다. 다행히 우리는 얼추 마흔 번째 안에 드는 것 같았다. 이 알베르게가 수용할 수 있는 순례자의 수가 여든여덟 명이니 던과 엄마가 아래층 침대가 돌아가고도 충분히 남을 순서였다. 나는 여전히 걱정하고 있는 프란체스카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에 안심이 드는 걸 볼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와 함께 뽀르또마린의 어느 교회에 들려 세요를 받았다. 사리아부터 하루에 두 개씩 세요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버스와 같은 탈 것으로 이동하지 않고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까지 성실하게 두 발로 걸어온 것을 확인해 주는 증표가 된다.
어느 순간부터 이웃하는 순례자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었다. 전에도 인사하며 지내는 이들을 꽤 있었지만 튼튼하게 연결되는 사이가 훨씬 많아진 기분이 드는 요즘이었다. 아무래도 프란체스카와 함께 다닌 이후로 부쩍 그런 관계가 많아진 듯싶었다. 프란체스카와 처음으로 대화를 텄던 날 그는 내게 난데없이 한국어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은영, 'You're a good daughter.' 이걸 한국어로 좀 알려줘."
"응? 그걸 왜?"
"네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어서. 어떻게 까미노를 엄마랑 같이 올 생각을 했어? 엄마랑 딸은 정말 어려운 관계잖아. 나는 단 하루라도 힘들 거 같은데! 넌 진짜 좋은 딸이야. 진심으로 그 말을 전하고 싶어."
한국의 친구들은 내가 엄마와 함께 까미노를 걸으러 갈 거란 이야기를 하면 하나같이 혀를 내둘렀다. 엄마와 딸 사이에 좋은 일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보다 마음 아픈 일이 훨씬 많다는 걸 동의하는 나는 이 복잡 미묘한 관계가 한국에 한정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를 만나며 이 또한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 프란체스카는 엄마와 나 사이에 이상 기류가 흐르는 순간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곤 했다. 내가 오 세브레이로에 혼자 갈 수 있도록 지지해 준 것도 같은 맥락에서 프란체스카가 우리를 살펴준 셈이었다.
알베르게의 소등 시간이 다가 올 무렵, 나는 이미 잠에 든 엄마의 침대 위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시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객실의 가장 앞쪽 침대를 배정받은 나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에우제뇨를 불러 세웠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온 순례자로 렌즈가 무지 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데 그걸로 길 위에서 종종 엄마와 내 모습을 찍어주곤 했다.
"에우제뇨, 어제 제게 한 질문 있잖아요. 그 답을 준비했어요. 내일 길에서 말씀드리고 싶어요."
"그래, 은영. 그 질문 기억하고 있단다. 그런데 우리는 내일 보기 어려울 거 같구나. 프란체스카에게 들었는데 내일 너희는 빨라스 데 레이까지 간다지? 나는 40km를 걸어서 멜리데에 갈 거란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목요일까지 가야 하거든. 그날 거기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어."
"그럼 산띠아고에서 말씀드릴게요. 아마 저희는 금요일에 닿을 수 있을 거예요. 거기서 봬요."
지난밤, 사리아에서 순례자 미사를 마치고 함께 오며 가며 얼굴을 익힌 이들과 저녁 식사를 했다. 자그마치 열세 명이 한 자리에 둘러앉아 식사를 했는데 한국,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네 개의 국적이 다른 이들이 모여있었다.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에우제뇨는 번역 앱으로 이탈리어를 영어로 번역해 내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 What positive experiences you are receiving in this journey? (이 여정에서 네가 얻은 긍정적인 경험은 무엇이니?)
매우 중요한 질문에 선뜻 답을 하지 못한 나는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답을 준비하려면 꽤 시간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그날밤 일기를 쓰던 중 어렵지 않게 답을 찾아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에 준비한 답을 에우제뇨에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동안 보지 못할 그에게 전할 답을 다듬을 시간을 얻게 되었다.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몰라.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닿아 그와 나눌 대화를 그리며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은채 잠에 들었다.
Day 29. JUL 8, 2024
Sarria → Portomarín, 22k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