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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영 Oct 09. 2024

마치 인생을 걷듯이 걸었어요

Day 33+1.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이른 아침, 객실의 발코니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광장을 바라보다가 배낭을 메고 길을 걷는 아멜리아를 보았다.


던과 엄마 그리고 나는 셋이서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어느 식당을 찾았다. 아침에는 프란체스카를, 방금 전에는 마르티나를 떠나보냈다. 까미노 가족이라 일컬었던 우리 다섯 중 이제 세 명만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남게 되었다. 밝게 웃으며 서로 안녕을 고했던 지난밤과 다르게 슬픔이 빈 테이블 위를 자리하고 있었다.


이내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이 차례대로 나오기 시작했다. 적막했던 공기가 달그락거리는 식기의 소리에 생기를 되찾아갔다. 두 어머니는 언제나 그랬듯 가족 이야기를 했다. 이제 곧 돌아갈 집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대화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순례를 마친 소감을 나누는 것으로 이어졌다. 엄마는 던을 바라보며 말했다.


"마치 인생 같았어요."


나는 엄마의 말을 이어받아 던에게 영어로 풀어 설명을 해주었다.


"힘들게 한 고비 한 고비 넘길 때마다 그 사이에 배우고 익숙해진 것으로 조금씩 나아지는 미래를 만들어가는 그런 인생처럼 까미노를 걸었어요."


그 어느 때보다 까미노에서 가장 편안한 얼굴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엄마였다. 엄마의 말에 동의하듯 나는 번역을 했고 던은 내 음성 사이에 쉼이 있을 때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여름 하늘

이상하게 순례를 마치고서 그 어떤 음식과 술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녁 식사 계획을 묻던 모니카의 연락에 난처할 정도로. 엄마도 식사 생각이 별로 없던 터라 우리는 추로스 카페에서 간단히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다음날부터 피스떼라를 향해 걸어갈 모니카를 만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싶다는 내 메시지에 모니카는 식사를 마치고 만나자고 했다. 


에밀리아와 이제 막 저녁 식사를 마쳤다는 이야기에 나는 그들이 있다는 식당으로 갔다. 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이 모이지 않았다. 나는 메시지를 다시 훑어보았다. 아, 이런! 식사를 마치고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앞으로 오겠다는 말이 뒤에 이어져 있었다. 식당에서 호텔은 멀지 않았지만 마음이 조급해져서 급히 달려갔다. 모니카가 호텔 위치를 모를 거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객실의 발코니에서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대성당의 광장을 내다보던 나는 배낭을 메고 길을 걸어가던 에밀리아를 발견하고 불러 세운적이 있었다. 내가 머무는 곳을 알고 있던 에밀리아가 모니카를 데리고 호텔에 함께 갔을 테니까.


예상한 대로 호텔 앞에 모니카와 에밀리아가 있었다. 엄마는 잘 쉬고 계신지 묻는 그들의 안부인사에 나는 엄마도 모니카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있는 방의 창문을 향해 힘껏 엄마를 불렀다. K-드라마 팬인 모니카는 내가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 재미있어했다.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엄마는 스페인이라는 먼 타국의 한 복판에서 '엄마'라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분별해 냈다. 엄마는 발코니로 나가는 창을 열고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평소 모니카의 눈웃음을 좋아하던 엄마는 그의 마지막을 배웅해 주었다.


"너랑 에밀리아가 묵는 곳까지 걸어갈까 하는데."


나는 이 친구들을 볼 때마다 아쉽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모니카와 에밀리아를 알게 된 시기는 순례 여정의 반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그때 나는 엄마와 함께 걷는 순례길에 몹시 지쳐있었다. 새롭게 알게 된 얼굴들이 반가웠지만 한편으로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둘 다 미국에서 온 친구들이라 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늘 부족한 나의 영어 실력이 들통나는 것 같았다. 마음의 여유가 없어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채 흘려보낸 기회를 이제라도 만회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렇게 헤어지면 미련이 남을 것 같아서. 나는 그들의 숙소가 있는 곳까지 좀 더 걷기로 했다. 


모니카와 에밀리아를 따라 걸은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나는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의 한가운데에 머물렀던 터라 시내 외곽을 나와 걸어볼 기회가 없었다. 아마 이들이 아니었으면 평생 걸어보지 못했을 길이었을 거다. 나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친구들에게 감사했다. 비탈길을 내려가던 중 모니카가 말을 꺼냈다.


모니카, 아멜리아와 함께 걸은 길

"브라이언이 그러던데 네가 러시아를 기차로 횡단했다고."


까미노뿐만이 아니라 내가 다닌 여러 여행지에 관심이 많았던 브라이언에게 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러시아를 여행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었다. 기차로 일곱 개의 시간대를 통과하고, 마음이 가는 곳마다 기차에서 내려 그곳을 마음껏 즐기고, 마지막에는 즉흥적으로 북극해를 지척에 둔 무르만스크까지 다녀온 여행을 말이다. 그렇게 나는 기차로 러시아를 한 달 반 가량 여행했다. 나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 모니카와 에밀리아에게 들려주었다. 내 여정에 흥미를 느낀 친구들은 잠시 공원의 계단에 앉아서 마저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 기차를 타면서 까미노를 종종 떠올렸어. 이 느린 여행을 말이야."

"왜? 기차가 많이 느려?"


에밀리아의 질문에 나는 이어 답했다.


"아니, 그 보다 뭐랄까. 이제 보통 도시 간 이동을 할 때 정말 '이동'만 하는 경우가 많잖아. 그런데 두 여행 모두 이동을 할 때, 곁에 있는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게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까미노는 걸어서, 러시아에서는 기차로 이동하며 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온종일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서로가 서로를 배워간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두텁게 경험했다. 비록 기차가 걷기보다 빠르더라도 기차 칸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다 보니 시간이 걷기만큼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마치 쭉 늘어진 시간의 프레임마다 서로를 새기는 것처럼. 나는 기차에 오르던 날,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 파울로 코엘료의 『알레프』를 읽었다. 첫 번째 까미노의 시작에는 그의 또 다른 소설 『순례자』와 『연금술사』가 있었다. 이 두 가지 소설 모두 산띠아고 순례길이 소재로 등장한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파울로 코엘료를 여행가로서 좋아하고 있었다.


"은영, 지난번에 까미노에서 만났던 친구들이랑 계속 연락하고 지내?"


모니카가 질문에 나는 지난밤 자정을 넘기고서 잭에게 보낸 메시지를 떠올렸다. 엄마와 시작한 순례를 마치고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대성당 앞에서 많은 친구들과 찍은 사진을 나는 잭에게 보냈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와 같은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당신과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여정을 통해 정말 멋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산띠아고를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많이 떠올렸으며 당신에게 배운 것들을 기억하면서 걸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잭, 당신이 많이 보고 싶고 언젠가 또 같이 이 길을 걷고 싶다는 소망도 함께. 


"그럼, 벌써 12년 전 일이지만 우리는 계속 연락하고 지내. 이번에 이 길에서 베드로를 만났고, 몇 년 전에는 미국에서 라이자도 만났어."

"우리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까미노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모두 이어져 있으면 좋겠어."


나 역시 그런 기회가 계속 닿을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의 연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그치지 않도록 말이다.


순례를 마치고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를 떠나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비행운




호텔에 돌아온 나는 브라이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스마트폰을 만졌다. 지난밤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정말 다시 만났다. 아침에 프란체스카를 보내기 위해 광장으로 나서던 길에서였다. 배낭을 메고 피스떼라를 향해 걷기 시작한 브라이언과 마주쳤다. 그 길이 엄마와 내가 묵고 있는 호텔 앞에 나 있었지만 그래도 약속을 한 것인 양 이렇게 또 만날 수가 있는 거지? 


삼 일간 걸어서 피스떼라에 도착할 생각으로 걷기 시작한 브라이언은 밤에 올베이로아에 닿을 예정이라고 했다. 며칠 전, 나는 올베이로아에서 라우라를 찾아달라고 브라이언에게 당부했다. 나는 잭과 함께 피스떼라로 가던 중 들린 올베이로아에서 저녁 식사를 하러 어느 바를 찾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일을 하던 갈리시아인 라우라를 만났다. 그때 그와 나눈 대화를 나는 종종 떠올리곤 했다. 올베이로아에 가게 되면 꼭 다시 라우라를 만나고 싶었는데 엄마와 함께 걸음을 멈추기로 결정한 나는 브라이언에게 부탁을 하게 된 거였다. 브라이언은 자신이 깜박할 수 있으니 메시지로 내용을 보내달라고 했다. 


갈리시아의 눈을 지닌 라우라

- 그날 바에서 만난 라우라와 함께 잭과 나는 갈리시아에 대해 이야기했어. 우리는 길 위의 아주 작은 것들을 통해 배움을 얻는 곳이 갈리시아라고 생각했거든. 그게 비록 길가에 아무렇게나 자란 잡초와 같은 것일지라도 말이야. 라우라는 조급하거나 성급하지 않고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갈리시아라고 말해줬지. 그것이 라우라가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였어. 나는 라우라의 눈을 보며 이것이야말로 갈리시아이구나, 하고 생각했지. 혹시 라우라를 만나게 된다면 내 이야기를 전해줘. 당신에게 배운 갈리시아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고. 그 덕분에 지금 갈리시아를 품은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 와 있다고 말이야. 부탁할게, 브라이언. 그리고 고마워.


나는 내가 기억하는 라우라에 대해 적어 내려갔다. 부디 그가 나를 대신해 라우라를 만날 수 있길 바라면서.



Day 33+1. JUL 13,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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