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3+3.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 피스떼라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 피스떼라를 향해 가는 버스 안에서 엄마는 멀미를 했다. 꼭 12년 전의 나와 같았다. 나는 산띠아고에서 피스떼라까지 걸은 후, 피스떼라에서 산띠아고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다가 꽤 고생을 했다. 아직도 걷는 것에 익숙한 몸이 탈 것에 의지해 이동하다 보니 놀란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잠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맑게 겐 하늘 아래 펼쳐진 피스떼라의 바다에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산띠아고에서 3박을 할 게 아니라 여기를 하루 더 묵었으면 좋았겠다고 엄마는 말했다. 하지만, 지난밤의 피스떼라도 산띠아고처럼 어김없이 비가 왔고 심지어 비바람이 몰아쳤다고 했다. 역시 바다를 끼고 있는 마을의 날씨는 종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운이 따라야 누릴 수 있는 어촌 마을의 정취에 우리는 감사했다.
까미노에서 마지막으로 묵게 된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점심 식사를 하러 길을 나섰다. 식사를 하던 중, 엄마는 누군가를 발견했고 그가 오는 방향으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다름 아닌 준이었다. 준은 우리가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 대성당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곧장 피스떼라로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흘의 여정 끝에 이제 막 무시아에서 피스떼라로 걸어온 참이었다.
엄마와 나는 준을 시작으로 피스떼라에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마주했다. 올베이로아에서 걸어왔다는 발렌티나를, 이번에도 누군가 만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는 레슬리 부부를, 무시아와 피스떼라 투어 프로그램으로 이곳에 오게 된 아멜리아를 말이다. 산띠아고에 머무는 동안 계속되는 잦은 이별에 몹시 마음이 지쳤던 나였다. 말미에는 그저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으니까.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며 온 곳이 피스떼라였는데 반가운 얼굴을 만나며 지금 이 순간의 날씨처럼 마음도 맑게 개는 듯했다.
대서양을 헤엄치는 물살이가 보고 싶다는 엄마와 해변을 따라 걷고 있을 때, 에밀의 할아버지인 장과 어머니인 소피를 만나게 되었다. 어느 노천카페에 앉아 있던 그들은 멀리서부터 우리를 알아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우리를 불렀다. 장과 소피가 내준 자리에 엄마와 나는 함께 둘러앉았다. 그 누구도 영어를 잘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대화는 어려웠지만 Smiling & Trying을 실천하며 우리는 서로를 향한 대화를 나눴다.
"같이 피스떼라 등대로 가지 않을래요?"
에밀을 기다리고 있던 소피가 물었다. 무시아에서 오고 있는 에밀을 피스떼라 등대에 도착하는 순간에 맞춰 축하해주고 싶다는 것이 이들의 계획이었다. 소피는 차를 가져온 터라 운전을 해서 등대가 있는 곶까지 갈 거라고 했다. 이왕이면 덜 걷자는 주의인 엄마는 그의 제안을 반겼다. 나는 웬만하면 피스떼라 등대가 있는 곳까지 걸어가고 싶었지만, 이따 일몰시간에 맞춰 다시 가기로 했으니 이번에는 차로 가볍게 다녀와도 좋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에밀을 축하해주고 싶었고 그와 함께 걸어올 브라이언의 중요한 순간 역시 챙겨주고 싶었다. 결국 우리가 산띠아고에서 헤어질 때 말한 것처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에 무척 들떴다.
피스떼라 등대에는 0.0km 표지석을 만날 수 있다. 과거 유럽인들은 피스떼라를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다. 이는 순례자들에게도 유효했다. 그들 중 일부는 산띠아고를 지나 이곳에서 순례를 마치며 한없이 펼쳐지는 대서양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또한, 새삼 인간이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느끼며 동시에 이 보잘것없는 존재가 800km를 넘는 거리를 순례하며 그 끝에서 깨닫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주어졌을 거다. 소피의 차로 이동해 바라본 0.0km 표지석은 12년 전에 슬리퍼 차림으로 이곳에 왔던 나를 상기시켰다.
피스떼라 마을 중심에 있는 알베르게에 체크인을 하고 등대까지 왕복 7km의 거리를 다녀올 거란 내 말에 잭은 좀처럼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0.0km 표지석이 있는 곳을 가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의아했지만 자신의 집이 있는 독일의 쾰른에서 4개월간 걸어온 잭에게는 그 표지석이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겠거니 싶었다.
최근 이틀간 빗속에서 순례를 한 탓에 고생을 한 나는 발 뒤꿈치가 다 까져 목이 올라오는 등산화를 더 이상 신을 수 없었다. 한겨울이었지만 두꺼운 양말 한 겹에 달랑 슬리퍼로 갈아 신고 0.0km 표지석이 있는 피스떼라 등대까지 걸어 올라갔다. 가능하면 해수면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을 바라보며 캔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순례를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도로를 끼고 가는 길이라 차가 계속 왔다 갔다 하는 터라 짙은 안개에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차를 신경 써서 걸어야 할 정도로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마침내 마주한 표지석의 '0.0km'라는 글자도 코 앞에 까지 다가가야 겨우 보일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피스떼라 등대 너머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에밀과 브라이언을 기다렸다. 소피는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번역 앱에 자신의 음성을 들려주었고 나는 이것을 영어로 번역했다. 나는 그것을 한 번 더 한국어로 번역했다.
- Nous nous sommes rencontres par hasard mais le hasard n'existe pas.
- We met by chance but there is no such thing as chance.
- 우연히 만났지만, 우연 같은 건 없어요.
두 번에 걸쳐서 명확하게 전달된 그의 말에 나는 그만 감동하고 말았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대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 될지라도 깊게 새겨질 사람이 소피라고 생각했다.
그때 마침 소피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았다. 바로, 에밀이었다. 거의 도착했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0.0km 표지석이 있는 곳으로 다시 이동했다. 곧 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들을 축하해 주었다. 에밀과 브라이언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일몰을 보러 피스떼라 등대가 있는 곶으로 같이 가겠다고 했던 엄마는 걸어 내려오는 길이 고단했는지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고 했다. 어째서 내 부모님들은 다 이렇지? 나는 마을 어귀에서 등대로 이어지는 길에 자리한 어느 성당 앞에서 브라이언을 기다렸다. 그가 나와 함께 일몰을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항상 제시간에 얼굴을 비춘 적이 없는 브라이언은 예상대로 이번에도 지각이었다. 아까와 다르게 구름이 점차 몰려오고 있었다. 일몰을 볼 수 있으려나? 나는 그를 기다리며 노래를 하나 듣기 시작했다. 지금 바라보고 있는 피스떼라의 바다와 닮은 노래가 떠올라서였다.
길었던 어젯밤 나완 상관없이
거친 파도가 날 여기에 태웠어
발은 닿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왠지 난 목소리를 내는 게 두려워
저 바람만 따라가면 보일 거야 그 노란 불빛
하지만 이 배는 욕심이 가득해
이 바다를 벗어나자 수평선 너머
푸른 그곳으로 저어가 자유롭고 싶어
- 프라이머리 & 안다, 〈The Open Boat〉 중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경치와 무척 잘 어울리는 선곡이었다. 평소에도 좋아하던 노래였다. 그러나, 자주 들으면서도 공감이 되지 않는 구절이 있어 매번 그 가사가 흘러나올 때마다 일시정지를 해놓고 문제의 그 문장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더러 있었다. 신기하게도 이번에 들은 〈The Open Boat〉의 그 가사는 명쾌하게 내 마음에 와 닻을 내렸다. 분명 난파선이라는 의미를 지닌 제목의 노래인데도 그 어느 것 하나 부서지거나 뒤집혀 흩어지는 것 없이 내 것이 되었다.
어쩌면 이 여정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서
우리는 모두 다들 그렇게 다 외로운 걸까
어쩌면 이 여정이 끝나지 않기만을 바라서
- 프라이머리 & 안다, 〈The Open Boat〉 중에서
나는 이 여정이 끝나는 것에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끝이 나지 않았으면 하는 덧없는 소망에 외로웠다. 생일에 프란체스카가 건넨 큰 민들레 씨앗을 불며 까미노가 끝나지 않길 바란다는 소원을 빌었어야 했는데, 하며 후회 중이었다. 끝이라는 시간의 마지막 지점을 외로움이라는 감정과 연결하지 못해 노래를 반 밖에 소화하지 못했던 나는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피스떼라에서 곡의 정서를 마침내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이 가벼운 차림으로 환복하고 나타났다. 그가 늦은 것에 대해 나무라기보다 나는 노래를 듣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브라이언의 코 앞으로 쓱 가져가 보여주었다.
"Do worry Be happy!"
〈The Open Boat〉가 수록된 EP의 제목'Do worry Be happy'이 앨범 커버 이미지에 적혀 있었다. 그걸 브라이언이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이 EP의 제목도 무척 좋아한다. 왜 다들 걱정하지 말고 행복하라고 말하지? 걱정을 하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데. 평소 걱정이 많은 편인 나는 걱정해도 된다는 EP의 메시지에 숨통이 트였다. 마치 내 감정이 뭐든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아서.
나는 까미노의 마지막 걸음을 브라이언과 함께 내디뎠다. 에밀은 0.0km 표지석 앞에서 가족들과 만나서 그 길로 바로 이곳을 떠난 터였다. 순례를 마치자마자 그가 까미노를 떠난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는 당황했지만 가족들에게 넘치는 축하를 받으며 떠나는 에밀을 보니 슬픔보다 기쁨으로 작별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이제껏 에밀과 수없이 많은 작별 인사를 했다. 그래놓고 다시 만나기를 반복했다. 이번에도 머지않아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그건 브라이언도 마찬가지였다.
"에밀 녀석, 다음 여행은 무조건 아일랜드야! 하며 떠나더라고."
"같은 유럽에 살아서 좋겠다."
"그저 운이 좋은 거지. 그나저나 은영 얼른 걸어야 해. 일몰 놓치지 않으려면!"
아직 일몰 시간이 다가오려면 넉넉한데도 나를 재촉하는 브라이언이었다. 아니, 이럴 거면 늦지를 말던가! 브라이언을 보자마자 나무랄걸 그랬나 보다, 하며 나는 웃음 섞인 후회를 했다.
12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멋진 일몰을 만날 수 있었다. 브라이언과 나는 바에서 맥주를 한 잔씩 주문했다. 역시 일몰에는 맥주가 빠질 수 없는 법이다. 서쪽으로 지는 마지막 햇빛이 맥주가 담긴 유리잔에 머물렀다. 나는 그 빛을 한 모금 마셨다. 피스떼라를 두고 인생을 반추하기 좋은 일몰이라고 말하던데 혼자 이 순간을 맞이했다면 생각이 더 깊어졌으려나? 나는 생각하기보다 함께 있는 브라이언과 나누는 대화에 집중했다.
"난 피스떼라가 정말 마음에 들어. 날씨도 정말 환상적이고! 어제 무시아에 비가 몹시 왔거든. 은영, 너는 어때?"
여행을 다니며 만난 사람들과 나눈 추억으로 도시나 마을을 기억하는 나는 지역의 풍광만으로 어느 곳을 선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는 잭이 내게 세 개의 조개껍데기를 건네준 무시아를 피스떼라보다 좋아했다. 이번에는 무시아는 가지 않았으니 여지가 없음에도 지난번과 다르게 일몰을 볼 수 있는 날씨가 허락된 피스떼라를 좋아한다고 말하기에 이유는 충분했다. 무엇보다 까미노에서 만난 가장 오래된 친구 브라이언과 이 일몰을 함께 나누고 있으니 피스떼라를 더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고 나니 달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달을 보며 다가오는 보름달을 가늠해 보았다. 달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짙은 밤은 찾아오고 있었다.
나는 비아나의 어느 세뇰에게 받은 나뚜랄 스틱을 버리기로 했다. 브라이언은 계속 한국에 가져가라며 닦달했지만 정말 그러고 싶어도 접히지도 않는 이 나뭇가지를 가져갈 방법이 없었다.
"그럼 이 깃털이라도 가져가. 어때?"
엄마가 나뚜랄 스틱에다가 달아놓은 깃털을 가리키며 브라이언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 까미노를 추억할만한 물건으로 챙겨갈만했다. 브라이언은 책 사이에 꽂아두면 멋질 거 같다며 고민하는 내게 끊임없이 설득했다. 그래 보지 뭐, 무거운 것도 아닌데. 나는 깃털을 묶어둔 고무줄을 풀었다. 옆에서 브라이언이 고무줄을 건네받으며 도와주었다. 나는 풀 숲 사이로 나뚜랄 스틱을 살포시 던져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엄마와 나의 또 다른 다리가 되어준 스틱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라시아스!"
버린 나뚜랄 스틱과 버리지 않은 깃털. 나는 버린 것과 버리지 않은 것의 차이와 이유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 싶었다. 나는 이번 까미노를 걸으며 무엇을 버리려고 했고 무엇을 가지고 돌아가고 싶었는지 말이다. 까미노 위에서 마주한 철 십자가 앞에서도 나는 내 삶의 무게를 내려놓기보다 오롯이 지고 싶었다. 버린다고 해서 마냥 후련해지지 않는 마음도 있는 거니까.
피스떼라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 브라이언이 하던 대화를 멈추고 무언가를 발견한 듯 땅을 가리켰다. 나는 까만 대지 위에 반짝이는 무언가를 보았다.
"반딧불이 같아."
어떤 행운이 찾아오면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완벽하다는 말이 아니고선 이 밤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보통 사람이 다가가면 도망간다고 하던데 우리가 만난 반딧불이는 멀리 날아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계속 빛나고 있었다. 마치 우리를 반겨주듯이. 나는 반딧불이의 빛이 밝게 빛나고 잦아드는 주기에 맞춰 호흡했다. 살아있는 빛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밤길은 무척 안전했다.
오스삐딸레로가 알려준 비밀번호로 문을 열고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유럽의 여름은 일몰이 늦게 찾아오기에 벌써 자정 무렵이었다. 나는 모두가 잠든 공기 속에서 나는 침대에 몸을 뉘이기보다 일기장을 펴기로 했다. 웬만하면 감상이 사라지기 전에 오늘의 하루를 기록하고 싶었다.
일기를 쓰다 말고 아까 가방에 넣어둔 깃털을 생각났다. 나는 그것을 꺼내 일기장에 포개어 올려두었다. 브라이언이 말한 대로 꽤 근사해 보였다.
"말 듣길 잘했네."
나는 깃털을 올려둔 일기장을 사진으로 담고서 마저 일기를 썼다. 이 밤이 지나면 엄마와 나는 더 이상 까미노에 있지 않을 터였다. 즉, 마지막 밤이라는 뜻이다. 브라이언을 기다리며 들었던 노래처럼 나는 여전히 외로웠다. 하지만 야속하게 시간은 흐르며 다음날 아침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며 만났던 한국인 언니 희의 말이 떠올랐다.
"어떻게 잘 헤어질 수 있을지 고민해야겠네요."
이별이 두렵다고 했던 내 말에 준 언니의 답이었다. 불가항력으로 찾아오는 끝과 이별은 시작과 만남의 대척점에서 매번 나를 도망치게 했다. 그러나, 언니는 어차피 찾아오는 것이 헤어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잘 헤어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중요하겠다고 말했다.
불안한 우리의 이 순간들도
밤이 지나듯 다 사라질 거야
멈추지 말고 계속 나아가자
- 프라이머리 & 안다, 〈The Open Boat〉 중에서
나는 까미노와 잘 헤어지기 위한 밤을 보냈다. 도망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방식으로. 끝은 또 다른 시작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Day 33+3. JUL 15, 2024
Santiago de Compostela → Fister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