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3+5. 포르투
"엄마, 바다 보러 갈래?"
퉁퉁 부운 눈으로 아침 식사를 하던 내 말에 엄마는 피식 웃었다. 절대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엄마의 기분은 바다를 보러 가겠냐는 내 질문 하나로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덩달아 꽁꽁 얼어붙은 분위기도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먼저 바다를 보러 가자고 제안한 나도 황당했다.
지난밤, 포르투로 넘어오는 버스 안에서 엄마와 심하게 다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내가 보기엔 엄마가 별 것 아닌 걸로 내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버스가 휴게소를 들릴 생각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짜증을 내게 토로하는 엄마의 태도가 싫었다. 버스에서 자다가 깬 나는 엄마의 마음을 받아주기보다 따져 들며 그 짜증을 밀어냈다. 엄마는 또다시 침묵으로 시위했고 아무 말하지 않는 엄마의 태도에 나는 덜덜 떨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말을 붙였다. 귀찮을 정도로 엄마를 건드리는 내 말에 엄마는 결국 터져버렸다.
"다른 사람한테는 상냥하게 말하면서 나한테는 말 좀 예쁘게 못하니?"
엄마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나 역시 분한 건 마찬가지였다. 왜 자꾸 엄마의 좋지 않은 기분을 내게 전염시키려고 하는 건데? 내가 웃으면서 엄마에게 말을 건네길 바란다면 엄마야말로 내게 이런 태도를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나의 두 남동생에게는 하지 않는 신세한탄 내지 다른 사람에 대한 불평을 내게만 유독 쉽게 늘어놓는 경향이 있다. 나는 어째서인지 엄마의 말을 계속 듣고 있다 보면 엄마의 부정적인 감정의 원인이 꼭 내게 있는 것만 같아서 조바심이 났다. 처음에는 엄마의 마음이 나아지도록 잘 들어주려 애를 썼지만 반복되는 대화의 패턴에 나는 지치고 말았다. 이제는 엄마에게 들이닥친 감정이 내게 원인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야. 각성한 나는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는 엄마는? 왜 나한테만 이러는데? 엄마도 나한테만 짜증 부리잖아. 동생들은 걔네들이 뭘 하든 이해하려고! '엄마'처럼 행동하면서! 나한테는 왜 그러는데? 왜 나한테는 엄마를 이해하라고 하는데? 엄마는 나한테 하는 말들 전부 다 걔네들한테 할 수 있어?"
나는 참아왔던 감정을 토로하며 사정없이 쏟아냈다. 엄마는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멈칫했다. 당황한 엄마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기를 쓰고 오열하며 엄마의 태도에 내가 상처받는 걸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들었다. 엄마 앞에 있으면 왜 나의 불쌍함은 후순위가 되어야 하는지 억울해서라도 이렇게 알려줘야겠어. 빽빽 소리를 지르던 나는 다 커서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어린애처럼 울었다. 우는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모르는 것처럼.
여행을 와서 엄마와 가장 크게 싸운 날이었다. 서로를 향해 짜증만 부릴 줄 알지 달래주는 법을 모르는 모녀는 사과의 말 한마디 없이 바다를 보러 가는 것으로 상황을 종료했다. 엄마는 바다가 그렇게 좋은가? 어떻게 바다 보러 가자는 말에 금세 기분을 풀어버리지? 지난밤 내가 쏟아낸 감정을 생각하면 억울할 지경이었지만 무사히 여행을 이어갈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해야 했다.
생각해 보니 엄마에게는 바다의 이름을 지닌 친구가 있다고 들었다. 깊고 맑은 바다의 이름을 말이다. 어린 시절에 동네에서 함께 쏘다니며 놀았던 친구이지만 이제는 어떻게 사는지 알지 못한다고 한 그 친구의 이름은 동해라고 했다.
"영아, 너도 그냥 바지 놓고 들어가 놀아라."
포르투 시내에서 500번 버스를 타고 도착한 바다에서 엄마는 바지 끝자락에 바닷물이 닿을까 싶어 허리춤을 잡고 어기적거리며 걷던 내게 말했다. 이미 엄마는 바지가 흠뻑 젖도록 바다를 즐기고 있었다. 까미노를 완주한 우리에게 손빨래는 이제 문이 없는 믹스룸에서 자는 것만큼 예삿일이 아니었다. 해변에서 엄마는 갈매기 깃털을 모으기 시작했고 나는 모래사장에 찍힌 갈매기 발자국이 마냥 귀여워 슬며시 웃음이 났다. 해변의 어느 식당에서 시원한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엄마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내 모습을 자신의 스마트폰 카메라로 담았다. 그건 기분이 완전히 풀렸다는 신호였다.
한식당에서 엄마가 만족해할 만한 저녁 식사를 하고 우리는 던과 도스를 만나러 갔다. 이른 아침, 그들은 포르투에 닿았다고 했다. 며칠 후, 포르투에서 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를 탈 거라고 했다. 젤라떼리아에서 만난 우리는 서로 사겠다고 하다가 결국 엄마와 내가 끝까지 주장을 해서 소소한 대접을 할 수 있었다.
달달한 젤라또를 먹으면서도 기분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이 지나면 정말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던은 이따금씩 눈물을 보였고 내 감정 역시 올라오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렇지만, 산띠아고 데 꼼뽀스뗄라에서는 눈물이 계속 쏟아져 난처했던 기억을 떠올려보면 피스떼라와 포르투에서는 꽤 담담한 편이었다. 피스떼라에서 헤어진 브라이언과 포르투에서 작별을 맞이하게 된 던, 이 두 사람은 이번 여정에서 내게 큰 존재였음에도 장소가 주는 정서가 있는 것인지 내 마음이 그리 요동치지 않았다.
"은영, 넌 내게 단 한 사람이란다."
던은 내게 "You are the one."이라는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당신도 내게 그런 사람이라며 나는 던의 말에 보답을 했다.
"날 돌봐줘서 고마웠단다. 네 어머니도 마찬가지이고."
"제가 아니라 당신이 절 돌본거예요, 던."
"우리는 서로를 돌보았지."
젤라또를 다 먹은 우리는 허그를 나눴다. 까미노에서 만난 또 다른 내 어머니, 던과 정말 헤어질 때가 되었다. 나는 멀어져 가는 던과 도스의 모습을 정성스레 영상으로 담았다.
"은영은 헤어지는 순간을 꼭 영상으로 남긴단다."
던은 도스에게 내가 무얼 하는지 설명했다. 엄마와 나는 그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포르투갈이 스페인보다 1시간 늦은 시간대를 쓰는 이유로 일몰 시간은 저녁 9시 무렵이었다. 이 사실이 정말 까미노와 멀어진 기분을 들게 했지만 덕분에 꽤 적절한 시간에 도우로 강변으로 나가 엄마와 야경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그리웠던 풍경과 마주했고 기억 속에 있던 포르투의 모습에 감사했다. 나는 12년 전 첫 까미노를 완주했을 때도 이곳에 와서 휴식을 보냈다.
엄마는 유럽에 와서 밤을 처음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까만 새벽은 참 많았는데 이런 야경을 함께 보는 건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엄마의 말처럼 늘 제 동네처럼 나다니던 나와 달리 취침 시간이 제법 이른 편인 엄마에게는 까미노 위에서 밤을 보는 건 쉽지 않았으니까.
우리는 아쉽지 않게 밤을 즐겼고 상쾌한 밤바람을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늘 그랬듯 내 침대는 이층 침대였다. 나는 조심스레 사다리를 밟으며 침대로 올라갔다. 침대 머리맡에 있는 불을 켜고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 위에 종이 한 장을 겹쳐 두었다. 그건 던이 엄마와 내게 써준 편지였다. 저녁에 만난 던은 날 보자마자 편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새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는지 어느 포장지 같은 것을 뜯어 쓴 거였다.
- 은영, 네 어머니와 다 함께 까미노를 걸을 수 있어서 영광이었어. 빰쁠로나에서 빛나는 은혜(Shining Grace) 널 처음 보았던 날, 네 사랑스러운 미소는 내가 스페인을 횡단하도록 안내하는 신호 같았단다. 함께 머무는 모든 마을마다 네가 준 도움은…
편지에서 던은 나를 'Shining Grace'라고 불렀다. 던이 내 이름을 자신의 스마트폰 메모 앱에 받아 적었던 날에 내게 은영이란 이름의 뜻이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은혜 은(恩) 자에 비칠 영(映) 자를 쓰는 나는 내 이름이 지닌 의미를 설명해 주었다. 그걸 기억하고 던은 종종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난 편지를 읽고 또 읽기를 반복했다. 엄마에게 해석한 문장을 들려주기도 했다. 특히, 엄마에 관해 던이 전한 메시지를 강조하듯 여러 번 말했다.
"던 아주머니가 함께 걷는데 동기부여가 되어주었다고 엄마에게 감사하대."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하염없이 다시 읽었던 것 같다. 읽을 때마다 던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아서다.
- … 난 너와 네 어머니를 영원히 사랑할 거란다.
벌써 던이 몹시 보고 싶어졌다. 나는 꿈에 그가 나오길 바라며 눈을 감았다.
Day 33+5. JUL 1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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