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3+19. 제주 → 서울
한국에 돌아와 지난 52일 동안 여행 메이트였던 엄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배웅하고 나는 제주로 가는 짐을 꾸렸다. 엄마에게 언질 하나 없이 홀로 나를 부르는 섬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내가 걸었던 길이 꿈인지, 지금 내가 있는 곳이 꿈인지, 모두 다 현실적이지가 않아 어디에 발을 딛고 있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이었다. 때마침 제주에 사는 지인에게 기쁜 소식이 들려왔고 나는 큰 고민 없이 그곳으로 날아갈 비행기 표를 샀다. 지난 여행을 너무 사랑한 탓에 아파하던 나를 달랠 방법을 비로소 찾은 셈이었다.
유럽에 대한 그리움에 아파하는 것은 둘째치고 나는 현실에 돌아와 마주한 물음마다 답을 하는데 머뭇거리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엄마와 다녀온 산띠아고 순례길이 어땠는지 묻곤 했다. 나는 분명 지난 여행과 다르게 이번 여행이 끝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앓아누울 만큼 그곳에 있는 동안 행복했다.
그러나, 그렇게 답을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이유는 나와 같이 엄마도 이번 여행을 만족해하며 즐거이 누렸는지 의문이 들어서였다. 여행의 말미에는 이 여행이 끝나는 것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여행 중 엄마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일 때 느끼는 불안이 먹어치우곤 했다. 그러니 내가 이번 여행이 좋았다고 답을 하기 위해선 엄마의 만족이 선행되어야 성립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자신 있게 엄마에게 여행이 어땠냐고 물을 수 없었다. 여행 내내 새로운 경험에 대한 즐거움보다 고된 여행으로 지쳐 의욕을 상실해 버린 엄마의 모습을 훨씬 많이 보아서다. 여행의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자책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아무리 둘이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들. 엄마는 엄마인 거고 나는 나인데 그걸 구분하지 않고 엄마의 답이 내 답이 되어야 할 것처럼 여기는 나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왜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거야. 이 여행이 내게 좋았다고! 하지만, 그렇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정말 엄마에게만 있을까? 사실은 나 역시 이번 여행이 마냥 좋지는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물음표가 잇따라 찾아왔다. 마지막 음절에 높은 소리로 매듭짓던 문장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나는 어느샌가 내 마음이 방황하는 이유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리스본을 다녀온 이후 다시 읽기 시작한 페르난두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통해서였다.
분명 예전에도 읽은 『불안의 서』였다. 그때는 불안을 타 존재의 감정처럼 바라보며 읽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만의 감상을 내리기 어려워 어느 문장으로도 그걸 완성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 책을 쓴 페소아의 헤테로님인 베르나르두 소아레스가 느끼는 감정마다 주억거리며 밑줄을 쳤다.
나라는 존재 자체로 피로감을 느끼는 소아레스. 그는 자신을 잃는 법이 해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일상에서 나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끊임없이 스스로 내가 누구인지 정의하려고 시도하는 사람에 속한다. 동시에 이 노력은 나를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존재의 이유를 나에게서 찾으려는 시도는 너무나 무거우니까. 가볍게 날아올라 자유롭게 비행하지 못하고 자꾸만 고꾸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그 물음이다. 나를 설명하는데 그저 '은영'이라는 두 글자만 있으면 되는데 그러질 못해서 여태 내가 지니는 것들을 놓지 못하는 지금을 마주했다. 집과 나의 일 그리고 딸이라는 역할까지 나는 그 어떤 것도 놓지 못하고 있음을.
나는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를 다시 되찾고 싶었다. 그 까닭은 바로 여행을 하는 동안 나를 쉽게 잃어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반면 이번 여행이 어려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끊임없이 나를 인식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마땅히 착한 딸이라는 역할을 스스로 강요한 채로. 그래서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홀로 떠나는 제주행은 불가피했다.
어김없이 나는 이번에도 방주교회를 찾았다. 제주에 머물게 되면 항상 빠짐없이 들리는 곳이다. 안덕에 자리한 이 교회의 뜰에 앉아 있으면 누군가 나를 꼭 안아주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쓸쓸해지면 그 품이 그리워 매번 찾아가게 된다.
나는 평소에도 생각이 너무 많을 때, 나를 비우고 싶을 때 그때마다 제주를 찾는다. 비행기로 날아온 것처럼 내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기분이 든다. 제주에 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하게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 힘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으나 제주는 항상 나를 스스로 직면할 수 있도록 돌봐준다. 이번에도 내게 그런 기회를 마련해 주었고 제주에 있는 동안 더없이 나만을 위한 시간으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 제주를 두고 다시 떠나는 길에 올랐다. 애초에 짧은 여정으로 제주를 온 것이기에 시간은 그만큼 금방 흘러가버렸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접한 제주의 반가운 소식은 내가 집처럼 드나들었던 게스트하우스의 주인이 결혼을 한다는 거였다. 그는 평생을 함께할 이를 위해 육지로 이사하며 게스트하우스를 다른 사람에게 인수하게 되었다고 했다. 주인이 키우던 유기견 동백이도 그들과 함께 육지로 이사하게 되었다. 영리한 동백이는 내가 그곳을 찾을 때마다 짤막한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나를 반겨주던 친구이다. 나는 그런 동백이에게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다.
집처럼 여겼던, 이제 더는 동백이가 살지 않을 이곳을 생각하며 사실 내게 '집'은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집도 언젠가 나를 떠날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마치 내가 오래전 나의 집을 떠났던 것처럼. 역시 머물 수 있는 집을 찾아다니기보다 스스로 집이 되어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집이 될 수 있는 내가 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겠다고 말이다. 그 '누구에게나'에는 '나'란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까미노에서 클리 아저씨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려보았다. 그가 말한 집이 무엇인지 이제는 정말 알 것 같다고. 내가 있는 곳 어디든 집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가져봐도 좋을 것 같다며 스스로 격려했다.
여행에서 뿐만 아니라 나는 가장 먼저 나 자신에게 집이 되어 주고자 한다. 이제 진정 집이라고 여겼던 것을 이를테면, '엄마'와 같은 것들로부터 '진짜'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서울, 제주에서 이 생각들을 정리하며 드디어 여행을 마친다.
Day 33+19. JUL 31, 2024
Jeju to Seo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