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랜서의 밥상
거시기한 밥상
학교는 다르지만 어쨌든 오래 알고 지내던 선배를 반려로 맞았다. 반려라는 호칭으로 합의하기 전까지 수많은 호칭으로 불렀다. 처음에는 ‘형’이었다. 그때는 서로 반말을 했고, 형과 아우처럼 스스럼없던 사이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면서 서로를 존중하자는 의미로 존댓말을 쓰자고 했다. 극존칭은 아니지만 적어도 반말은 하지 않는 상태로 불렀다. ‘여보’라는 말을 닭살돋지만 쓰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에게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아이를 낳고 나서는 ‘누구 아빠’와 ‘누구 엄마’로 불렸다. 나는 ‘남편’, 반려는 나를 ‘와이프’라고 불렀다. 그런데 나는 ‘와이프’라는 말이 싫었다. 차라리 ‘각시’라면 모를까 ‘와이프’면 나도 영어로 불러야 하는데, 그 말이 겉돌았다. 내가 바깥 활동이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남편이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을 무렵에는 ‘집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반려’라는 호칭으로 부르기로 합의했다. ‘남편’이나 ‘아내’처럼 안과 밖이나 누군가의 편이 아닌, 서로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사이로 가자는 의미였다. 그러니 이 글에서 ‘반려’라 함은 다름 아닌 내 남편을 일컫는 호칭이다.
반려와 나는 살아온 방식이 많이 달랐다. 뭐, 그러니까 끌려서 결혼까지 했겠지만.
결혼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아이를 가졌는데, 골반이 틀어져서 임신했을 때 고통이 엄청 심했다. 게다가 당시 직장이 오전 여덟 시까지 출근해야 했는데, 신혼집에서 직장까지 30분에서 40분 정도 걸렸으므로 출근이 정말 힘들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고,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뱃속에 아이는 있고, 집안 살림은 손에 익지 않았고, 시댁은 바로 옆집이었다. 직장에 다닐 때는 며칠에 한 번씩 함께 저녁을 먹었는데, 일을 그만두니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끼 이상을 먹을 때도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위치가 바로 ‘며느리’라는데, 나도 마찬가지였다.
반려는 육남매에서 다섯째였고, 반려의 누나들은 하나같이 요리 고수들이었다. 그분들이 시댁으로 오면서 반찬을 가져오는 날이면 나 또한 반찬을 잔뜩 가져오곤 했다.
“생김치가 먹고 싶어서 살짝 무쳤어.”
김치통을 한 통 가져온 날 들었던 말이었고,
“시장에 고구마순이 많더라고.”
고구마순 김치를 한 통 받았고,
“입맛이 없어서 한 번 해 봤어.”
저녁상에 올라온 구절판을 두고 들었던 말이다.
나도 내 밥은 해 먹던 사람이었는데, 전혀 차원이 다른 밥상을 접하면서 의욕을 완전히 잃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재료 씻기와 설거지에 불과했다.
나도 내 밥상을 제대로 차리고 싶었고, 새로운 음식들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넘어야 할 단계가 너무 많았다.
“둘째야, 거시기 좀 가져와라.”
“셋째야, 거시기가 없네. 앞에 가게에서 사와라.”
“막내야, 거시기 씻었냐?”
주 요리사인 시어머니는 거시기에서 거시기로 의사를 소통했는데 다른 식구들은 다 알아듣고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거시기는 마늘, 참기름, 소금, 깨소금, 설탕, 젓가락, 주걱, 냄비뚜껑, 행주 등 다양했다. 왜 고유 명사를 쓰지 않고 모두 다 거시기인지 알 길이 없었다. 처음에는 나를 골탕먹이려고 이러시나 싶었는데, 대충 눈치로 때려잡아서 내가 맞추려 하면 모두 정답이 아니었다.
나중에야 ‘거시기’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요리 과정이 몸에 익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때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러다 큰 애를 낳았다.
밥상에는 여전히 시댁에서 만든 음식들이 올라왔는데, 나는 육아에 지치고 힘들 때면 엄마가 만든 음식이 먹고 싶었다. 멀리 사는 엄마에게 음식을 얻어 먹으러 갈 수 없었고, 전화로 물어보고 만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때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이미 프리랜서의 길로 들어선 상태였다. 물론 그 아르바이트는 ‘작가’가 아니라 논술 첨삭이었지만.
내 밥상은 내가 만든 음식이 아니고, 내가 오랜 세월 먹어온 음식도 아니고, 내 반려가 먹어온 음식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내가 먹어온 음식이 그리웠다. 거시기한 밥상이 아니고, 내 밥상을 직접 차리고 싶었다.
그래서 요리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그때부터 몇 년 간, 내 부엌은 실험실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