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를린, 바르샤바 일기 16 (아우슈비츠, 비르네카우 수용소)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독일은 소련과 밀약을 해서 폴란드 절반은 독일이, 나머지 절반은 소련이 점령했다.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대인 300만 명은 게토에 거주했다. 게토에는 식량은 부족했고, 전염병이 돌았다.
그 사이 독일은 소련과 전쟁을 벌였고, 소련 지역 유대인들을 학살했다. 그때 우연한 계기로 가스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보낸다.
‘Memorial and Museum Auschwitz-Birkenau’. 1수용소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강제 노동 수용소’이고, 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절멸 수용소’였다. 곧바로 죽거나 죽을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3 수용소인 ‘모노비츠 수용소’도 강제 노동 수용소인데 이번에는 1과 2 수용소만 들르기로 했다.
캐리어를 숙소에 맡기고, 수용소로 갔다. 가방을 엑스레이로 검사하고, 여권으로 신분을 확인하고, 수용소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 영어 가이드와 만났다. 함께 다닐 사람들은 폴란드가 아닌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로, 가이드의 설명을 나눠준 이어폰으로 들었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입구 위에 한 글자씩 붙은 글자가 보인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매일 일을 하고 수용소로 돌아와야 했다. 아래가 크고 위가 작아야 할 ‘B’가 좌우가 뒤집힌 채 붙어서, ‘B’의 위가 크고, 아래가 작다. 글자를 하나씩 조립하던 수용소 노동자들은 항의하는 표시로 ‘B’를 돌려 붙였다. 이 글자는 매일 출입하는 사람들에게 ‘반항’뿐만 아니라, 꼭 살아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알려야 한다는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출입구 근처에는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던 장소가 있다.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수감자들은 이곳에서 오케스트라 연주를 했다. 그 사이에 간수들은 숫자를 세고, 행진을 통제했다. 오케스트라는 1수용소와 2수용소에 네 군데에서 연주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관람은 벽돌 건물들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다른 동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한다.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그 역사를 반복할 것이다. - 조지 산타야나’의 글이 마음을 울린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폴란드 아우슈비츠를 향해 곳곳에서 기차가 출발했다. 화물기차에 실린 수감자들은 며칠에 걸쳐 이곳으로 왔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유럽 내 유대인 총 600만 명이 학살되었는데, 그 중 100만 명 정도가 아우슈비츠와 비르케나우에서 죽었다. 1수용소에는 SS친위대 주사령부가 있었다.
베를린 ‘Mahnort’ 정류장에서 보았던 ‘아이히만’이 주축이 되어, 나치는 유대인을 비롯한 사람들은 화물 열차에 실었다. 기차는 수용소 안까지 들어와 멈춘다. 유대인들이 내리면, 독일군이 남성과 여성, 어린이로 나눈다. 왼쪽은 가스실로, 오른쪽은 노동 수용소로 갔다.
왼쪽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비누를 하나씩 나눠주고, 따뜻한 수프를 마련했으니 얼른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치라고 했다. 며칠 동안 화물 기차를 타고 이동한 유대인들은 따뜻한 수프를 먹고 싶어서 옷을 벗고 샤워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린 것은 ‘치클론’이라는 독성 가스였다.
하지만 독일이 가스실에서 유대인을 학살했다는 물적 증거가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종전 이후에 남은 증거는 수감된 생존자밖에 없었다. 이곳에 유일한 증거 사진이 있다.
‘존 더 코만도(Sonderkommando)’라는 그룹이 찍은 사진으로, 그들은 가스실에서 학살을 담당하는 임무를 맡았던 조직이었다. 유대인들을 샤워실로 안내하고 죽으면 금니를 뽑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소각로로 보내는 역할을 했으며, 3개월 정도 지나면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 소각로가 수용할 인원을 넘어서자 야외에 구덩이를 파서 소각했다. 그때 찍은 사진 세 장이 학살의 증거로 남았다. 1944년 여름, 유대인 존 더 코만도 수감자들이 비밀리에 촬영해 수용소 외부의 폴란드 저항운동 세력에게 넘겨서 이 사실을 외부에 알렸다. 1944년 10월, 존 더 코만도 항쟁이 일어났다. 수감자들은 SS 친위대원들을 공격했고 4호 화장장 건물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일부는 수용소 울타리 밖으로 탈출했으나, 추격 도중 모두 죽임을 당했다. 450명 수감자와 3명의 SS 친위대원이 사망했다.
그리고 수북하게 쌓인 안경, 보형 보철물, 냄비, 그릇, 이름이 적힌 여행 가방, 구두 솔, 산처럼 쌓인 신발, 아이 옷들, 작은 신발……. 이 물건들은 창고에 쌓여 있던 일부에 해당한다. 쓸만한 물건들은 이미 독일로 보내서 재활용했다.
작고 연약한 존재들이 왼쪽으로 분류되어 도착하자마자 살해당했다. 그들이 갖고 있던 물건들은 압수당했고, 금니는 뽑혔으며, 머리카락은 잘려서 섬유 공장으로 보내 옷감이 되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거둔 머리카락이 2톤이 넘는다는 설명에 사고가 정지되었다. (머리카락은 촬영 금지다.)
수용소가 해방되자 연합군들은 생존자들을 돌보았지만, 너무 굶주렸던 생존자들 가운데는 급하게 먹다가 죽기도 했다.
아트 슈피겔만은 『쥐』에서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를 토대로 ‘카포’에 대해 서술했다. 카포는 유대인이 아닌 정치범 등 다른 수감자를 관리하는 수감자였다. 다른 수감자들은 묽은 죽을 먹을 때 카포는 버터와 빵을 먹었고, 넓은 방에서 혼자 지냈다.
아우슈비츠에서 의학 실험을 하던 죽음의 천사, 군의관이었던 요제프 멩겔레는 수용소에서 쌍둥이와 인종에 대해 끔찍한 실험을 했다. 눈색깔을 바꾸려고 눈에 약품을 넣었다가 실명하게 만들었고, 쌍둥이를 샴 쌍둥이로 만드는 실험도 했다. 칼 블라우케르그는 불임과 거세 실험을 주도했다.
블록 11에는 수용소 감옥이 있다. 아우슈비츠를 탈출하려던 사람들이 다시 잡혀왔을 때, 독일군은 이들에게 다른 수감자들 열 명을 무작위로 뽑아서 처형한다고 했다. 그때 뽑힌 사람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어서 울자,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자신이 죽겠다고 자원했다. 독일군은 콜베 신부를 감옥에 가둬 굶어죽이려고 했으나 2주가 지나도 죽지 않아서 결국 약물로 죽였다고 한다. 총살로 사람을 죽인 벽 근처에 꽃다발이 놓여 있다. 이곳에는 사람을 매달아두던 막대도 복원해 두었다.
그리고 사진 촬영이 금지된, 블록 11 지하에는 독일이 소련군 전쟁 포로에게 처음 치클론을 실험했다. 이들을 가스로 죽이는 데 성공하면서 나치는 이런 방식이 독일군에게 죄책감을 덜면서 유대인들을 없앨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 지하에서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가 아사형을 선고받고 갇혔다.
1수용소에 있는 가스실과 소각로는 2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쓰기 이전까지 사용했고, 2수용소에서 가스실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독일군의 방공호로 용도를 바꾸었다. 그래서 흔적이 남아 있어서 전쟁 이후에 가스실로 복원할 수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1수용소를 나왔다.
이제 2수용소로 이동하는 셔틀버스를 탔다. 노란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된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우리는 사진을 몇 장 찍고, 버스를 탔다. 버스가 2수용소인 비르케나우 앞에 섰다. ‘Birkenau’는 폴란드어로 브줴진카(Brzezinka), 자작나무 숲이라는 뜻이다. 이 주위에 원래 자작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셔틀버스에서 내리자 먼저 온 가이드와 만났다. 가이드는 긴 우산을 들고 있었다. 비 예보가 있다고 했다. 1수용소에서 같이 움직였던 우리 팀이 다시 같이 움직였다.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압도적인 풍경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1수용소보다 규모도 크고, 기차 선로가 수용소 안까지 곧바로 통과할 수 있다. 선로 위에 열차 한 칸이 놓여 있다.
이 열차가 놓인 장소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본 사진에서 수감자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누던, 그 자리다. 화물열차에 적게는 40명, 많게는 80명 정도가 타고 왔고, 그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가 되었던 곳이다.
비르케나우에는 가스실이 4개 있었고, 한 곳에서 한 번에 2천 명을 학살할 수 있었고, 하루에 4756구를 화장했다.
나치는 전쟁이 끝나자 가스실과 소각로를 부숴 흔적을 없애려 했다.
야외에 있는 웅덩이는 1수용소에서 본, 존 더 코만도가 찍은 사진에서처럼 외부에서도 시체를 소각했던 흔적이며 이때 소각된 재는 잘게 부셔서 화물차로 비스와강에 버렸다.
그때 희생된 사람들이 쓰던 23개 언어들로 쓰인 23개 안내판이 근처에 나란히 있다.
숙소는 1수용소보다 더 열악하다. 3층 침대 한 층에 여섯에서 일곱 명 정도가 잠을 잤고,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한 채 사는 수감자들은 화장실에 갈 기력이 없어서 자면서 설사를 했다. 그 설사는 아래층으로 고스란히 떨어졌으며, 가장 아래칸에 자는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
비르케나우 수용소는 수감자들을 모두 죽일 목적으로 세운 ‘절멸 수용소’이기 때문에, 이곳 환경은 개선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동안 영화에서, 책에서, 그림에서, 사진에서 듣고 보았지만 그래도 직접 본 상황은 또 달랐다.
영어로 쓴 재난 문자가 휴대폰으로 왔다. 비와 돌풍이 불 수 있으니 가급적 외출하지 말라고 했다. 내 마음에 부는 비와 돌풍을 꺼낼 수 있다면, 지금 눈앞에서 부는 바람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와 우리, 그들이 다르다고 해서 그들을 없애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는 지금도 들린다. 차별과 혐오를 내세우는 사람들에게서 아이히만과 히틀러가 저지른 일들이 겹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혐오와 차별에 등급을 나눌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 조심해야 한다.
“따뜻한 수프를 먹으려면, 얼른 씻고 샤워실로 가라.”
아이들 손을 잡고 가스실로 향한 어머니는 치클론 가스를 맡고 아이를 높이 올렸다. 조금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 그 자세로 굳어갔다. 2중 담장과 전기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이곳에 있던 수감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살아남는 것뿐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마음, 이 먹먹하고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아주 커다란 숙제를 떠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