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소를 나오자 하늘이 우중충해지고 바람이 불었다. 숙소에서 캐리어를 찾아서 크라쿠프로 가는 버스를 탔다. ‘크라쿠프(Kraków)’는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폴란드의 수도였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군사기지와 총독부가 이곳에 있어서 중세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다.
크라쿠프 중앙역 근처 숙소에 도착했다. 날이 흐려서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았다. 수용소에 들렀다 온 날이어서 마음이 지친 상태였다. 드러누워서 쉬고 싶었지만, 크라쿠프에는 하루만 머물 수 있고, 내일 아침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후반부 일정이 빠듯했던 것은 비행기표와 상관 있다. 우리가 비행기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표값이 어마어마하게 뛰었다. 일단 표를 확보한 뒤 일정을 짜다보니, 사실상 하루나 이틀 정도를 더 써야 할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나왔던 그 배경인 공장이 크라쿠프에 있는데, 우리가 도착하는 날은 휴관이었다.
비가 살짝 내리고, 날씨는 서늘했다. 점퍼를 껴입고 우산을 챙겼다. 그러고는 정류장에 있는 티켓 판매 기계에서 표를 샀다. 폴란드 버스와 트램에는 표파는 기계가 정류장에 있는 곳도 있고, 버스와 트램 안에서 표를 살 수도 있다. 내 카드에서는 pin code, 즉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문구가 떴고, 실제로 몇 단계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표를 사는 건 힘들었다. 표는 1회권이 있고, 60분안에 갈아탈 수 있는 표 등이 있다.
버스를 타고 구 시가로 향했다. 둥그스름한 요새 같은 입구, 바르바칸(Barbaken)을 마주했다. 이 도시는 타타르족(몽골)이 침략했을 때 피해를 입었고, 그때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이런 요새 같은 출입구를 만들었다. 둥글게 도시를 감싸는 바르바칸 주위로 해자를 팠는데, 지금은 풀들이 자라고 있다.
원래 7개 문이 있었다는데, 이 중 유일하게 남은 플로리안 문(Florian Gate)가 바르바칸 뒤에 있다. 이 문을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서면 요새 밖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잘 닦인 돌바닥, 반듯하고 깔끔하면서 옆 건물과 균형을 맞춰 지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폴란드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아담 미츠키에비치’ 동상은 독일이 파괴했고 1955년에 재건했다고 한다. 폴란드 사람들이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한다. 이 동상 앞에서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를 도와달라는 모금 행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베를린에서도 우크라이나를 위한 모금 행사는 여러 번 보았다. 우리는 모금함에 작은 성금을 보탰다.
‘라투슈초바 탑’은 옛날에는 시청의 일부분이었고, 지금은 종탑과 시립박물관이라고 한다. 지하에 감옥이 있다는데, 겉에서만 바라보았다. 건물 외관이 일관되지 못하고 적벽돌과 시멘트 벽돌이 섞인 형태다. 부서졌다가 보수한 흔적 같았다. 바로 옆에 그 탑의 원래 모습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근처에 얼굴을 붕대로 감은 상태에서 눈을 드러낸 흉상, ‘Eros Bendato Rzeźba’는 폴란드 출신의 조각가 이고르 미토라지가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자신의 조각품을 상업용 건물 앞에 둘 수 없다고 해서 현재 위치에 놓았다고 한다. 입을 열지 못하게 붕대로 친친 감겼으나 부릅뜬 눈으로 진실을 보려는 강렬함이 느껴졌다. 흉상이 놓인 이 도시에 독일군 사령부가 있었고, 폭격은 피했으나 그 오명 또한 간직한 도시 크라쿠프를 상징하는 듯했다.
바벨성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비가 거세게 쏟아졌다. 기온이 뚝 떨어졌고, 우산을 뒤집는 바람이 불었다. 늦가을처럼 쌀쌀한 날씨였다. 캐리어에 두고 온 스카프가 몹시 그리웠다.
“너무 추워.”
아무리 6월이라도, 북위가 높은 유럽 도시를 여행할 때는 경량 패딩을 꼭 챙기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서 경량 패딩을 챙겼는데, 마지막에 짐을 정리하다가 캐리어 무게 때문에 뺐다. 그 경량 패딩이 간절했다.
학생들이 떼지어 바벨성 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아이들은 비를 홀딱 다 맞은 채 종종걸음으로 우리를 스쳐갔다. 그러다 어떤 남자아이가 윗도리를 벗은 채 옷을 휘두르며 지나갔다. 점퍼를 입고도 추웠던 내가 깜짝 놀라자 그 아이는 깔깔 웃었고, 나도 같이 웃었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해서 일행인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추위를 피해 다시 구시가로 돌아가기로 했다. 바벨성을 관람할 예약도 안 했고, 외관만 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라면 굳이 하고 싶지 않았다.
따뜻한 커피를 마신 뒤 직물회관(Sukiennice)으로 들어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쇼핑몰이라는 이곳은 14세기에 지어졌고 1555년에 재건되었다. 길게 이어진 연베이지색 건물에 들어서면 양쪽으로 작은 가게들이 문을 열고 사람들을 반긴다. 건물 천장에 있는 가문의 문장들은 길드였던 이곳의 역사를 나타낸다. 2층에는 미술관이 있으나, 늦게 도착하여 1층만 구경했다. 폴란드 수공예품과 옷, 장난감 등이 눈에 띄었다.
나는 호박을 파는 가게에 섰다. 폴란드는 호박이 유명한데, 이 호박은 러시아에서 떠내려와 바다에서 건져내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와 가까운 바다에서는 해안가에서 호박을 건지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가게 주인은 팔찌를 만지작거리는 나를 보자 편하게 보라면서, 진열대에 천을 깔고 팔찌가 든 바구니를 엎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팔찌를 나와 같이 골랐다.
그 가게에서 팔찌 두 개와 호박 십자가 한 개를 샀다.
“엄마, 폴란드에 호박 싸던데, 하나 사드릴까?”
엄마가 내 전화를 받고 잠깐 멈칫하셨다. 그러더니 밝게 대답하셨다.
“아니, 애호박이 그렇게 싸다고?”
“애호박 아니고, 보석 호박!”
“됐어. 하고 다닐 데도 없고. 너나 해.”
우리는 깔깔 웃으며 통화를 했다. 건강하게 잘 다니다 오라는 엄마 말에 어깨가 쭉 펴졌다.
성 마리아 성당은 구 시가의 랜드마크다. 높이가 다른 두 개 첨탑이 인상 깊다. 형과 동생이 첨탑을 각자 쌓았는데, 형이 만든 첨탑이 더 멋지고 훌륭하자 시기한 동생이 형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높은 쪽이 형의 솜씨다.
이 첨탑에서는 매 시간 나팔 소리가 울렸다가 뚝 끊긴다. 13세기에 타타르 족이 침입해 오는 것을 발견하고 트럼펫을 불었는데 곡이 끝나기 전에 적이 쏜 화살에 맞아 나팔수가 사망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지금도 연주는 그가 연주했던 부분까지 하고 중간에 끊어진다.
마리아 성당에는 “여행자 출입금지, 기도자 출입 가능”이라는 표시가 있다. 우리는 조용히 성당 안으로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초에 불을 붙이고 두 손을 모았다.
“어디에서 왔어요?”
낯선 우리를 보자 신부가 말을 걸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신부님.”
“저 앞으로 가서 앉아도 됩니다.”
여행자가 출입하면 안 된다는 문구를 읽었기 때문에 잠깐 저어했다.
“당신의 여행을 위해서, 앞에서 기도하세요.”
우리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제단에 가까운 곳에, 양 옆으로 앉아서 기도할 수 있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금색으로 칠한 의자에 앉으니 기도보다 사진을 찍고 싶은 욕망이 자꾸 들었다. 그러나 카메라를 내려놓고 온전히 내 눈에 담았다. 파란색 천장과 붉은 벽, 높이 매달린 십자가와 초처럼 밝힌 전등이 나를 토닥였다. 이 성당이 담고 있는 역사와 전설, 그리고 이곳에 들른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함께 어우러지는 순간을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성당에서 나와 거리를 산책했다. 오전에 수용소를 들렀다가 오후에 크라쿠프까지, 너무 많은 정보와 힘들었던 일정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맛있다는데, 추워서 엄두를 못 냈다. 대신 파치키(paczki)라는 잼 도넛을 샀고, 가게들을 둘러보았다. 폴란드는 수공예 도자기로 유명하다. 가게마다 도자기에 찍힌 문양이 다르고, 독특한 그릇들도 많았다.
그리고 ‘골롱카’를 먹었다. ‘올드 타운’이라는 식당에서 먹은 ‘골롱카’에는 고추냉이가 섞인 소스에 돼지 족발 요리를 찍어 먹었는데, 꽤 맛이 좋았다. 폴란드 맥주와 함께 골롱카를 나눠먹으면서 폴란드가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 안 오는 날, 다시 오고 싶네.”
“그러게.”
바벨 성 근처에 불 뿜는 용이 궁금했다. 무엇보다 환하게 웃으며 관광객을 대하는 이 사람들의 미소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