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 전날의 오후 다섯 시 무렵. 심심하던 우리 부부는 요즘 핫하다는 수원의 스타필드를 찾았다. 둘 다 사람들 붐비는 곳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스타필드에서 특히 소문난 '별마당 도서관'을 보고 싶다는 나의 의견을 남편은 받아들였다. 나는 명절 오후라 여행길로 귀향길로 사람들이 많이 분산된 상태이니 그리 붐비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예상으로 남편을 설득했다.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진입부터 엉금엉금 기어가야 했고 주차를 시키는 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남편의 얼굴엔 짜증기가 묻어났고 그런 남편을 보는 나의 기분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3층에서 7층까지 원형으로 만들어진 별마당 도서관은 소문대로 거대하고 웅장한 구경거리였다. 곳곳에 앉아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만들어져 있음에도 단 한 곳도 빈자리가 없었다. 나는 도서관이라고 해서 고풍스럽고 아카데믹한 건축물을 기대하고 왔는데 현란하고 테크니컬 한 초현대식 건축물일 뿐인 것 같아 조금 실망스러웠다. 7층에서 시작해서 3층까지 내려오면서 구경하기로 했는데 4층쯤에서 남편은 참지 못하고 그만 나가자고, 평일에 친구들하고나 다시 오든가 하라고 했다. 사실 나도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시간 들여 여기까지 왔는데 3층까지 다 둘러보지도 않고 그만 가자고 하는 남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자연히 둘 다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남편은 출출하다며 뭐라도 먹고 가지? 저녁은 먹어야 될 거 아냐? 하고 물어보았다.
그러든가... 나는 성의 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다시 7층에 있다는 잇토피아로 올라갔다. 그곳은 거의 도떼기시장처럼 붐볐다. 각 매장의 키오스크 앞마다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역시 빈자리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래도 먹고 가려고 음식을 고르면서 줄이 짧은 키오스크를 찾고 있었는데 남편은 금방 질렸다는 듯이 그만 가자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나도 아무 말 없이 따라갔다. 이런 의견차이 때문에 신경전을 벌이거나 으르렁거리고 싸울 나이는 이미 지났다. 서로에게 실망하기에도 지쳤다. 그냥 웬만하면 져주고 마음 편히 지내는 것이 앞으로의 가정생활 유지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롯데마트에 들른 것은 남편의 뜻이었다. 집에서 걸어서 이용하기도 가능한 창고형 할인 마트가 생기기 전에 가끔 승용차로 이용하던 대형마트였다. 대량으로만 판매하는 창고형 할인마트보다 세 명으로 이루어진 우리 가정에 더 맞는 마트이다. 오랜만에 저기 들려 볼까? 남편의 말에 나는 이번에도 썩 내키지는 않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1층 식품 코너에서 식재료 몇 가지를 사고 나오려던 참에 남편이 3층에 있는 하이마트에 가보자고 했다. 평소 전자제품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 남편이기에 나는 그러자고 했다. 남편은 전자제품 코너로 가고 나는 주방용품 코너로 들어갔다. 이것저것 구경하다가 남편이 있는 전자제품 코너로 가 보았다. 남편이 어느 진열대 밑에 앉아서 신중하게 무언가를 고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블루투스 키보드'였다.
어? 블루투스 키보드네... 아... 여기에 있구나... 생각도 안 하고 있었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저절로 목소리가 높아졌다. 남편은 블루투스 키보드 두세 개를 설명서를 비교해 읽어보면서 들었다 놨다 하고 있었다.
블루투스 키보드 얘기를 언제 남편에게 했는지도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언젠가 핸드폰으로 톡을 하거나 뭔가를 좀 길게 쓰려면 몇 글자가 계속 입력이 잘 안 되고 계속 오타가 나서 불편하다고,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보니까 핸드폰과 연결해서 사용하는 키보드가 있던데... 내 핸드폰은 오래된 모델이어서 안 되겠지... 휴대하고 다니기 참 좋겠던데... 했었다.
나조차도 잊어먹고 있던 그 말을 기억해 내고 직접 사 주려고 남편은 일부러 마트에 들른 것이었다. 핸드폰이 후져서 연결 안 되면 어떡하냐는 내 걱정에 남편은 된다고, 걱정 말라고 했다.
집에 오자마자 나는 거실의 탁자 위에서 남편의 도움으로 블루투스키보드를 사용해 보았다. 아... 이 문명의 신기함과 편리함이여...
와... 이제 무거운 구형 노트북 안 가지고 다녀도 되겠네... 세상에... 참 기술이 좋긴 좋구나... 핸드폰과 이 블루투스 키보드만 지고 다니면 언제 어디서든 맘껏 쓸 수 있겠는데...
나는 약간 흥분해서 말했다. 남편은 뭘 쓸건대? 물어보면서 티브이를 켰다.
모르지 뭐... 뭘 쓸지...
내 대답은 시끄러운 티브이 소리에 섞여 들었다.
더 이상의 기술 발전은 인류의 재앙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설익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나는 이 조그만 블루투스 키보드 앞에서 최신형 노트북을 손에 넣은 건 만큼이나 기뻐했다.
남편은 그게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냐는 표정으로 나를 흘끗 보고는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보냈다.
고마워... 나는 무심한 척 남편에게 말했고 남편은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티브이에 시선을 둔 채로 미소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