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80년대 초 내 고향 경상북도 ㅇㅇ군 ㅇㅇ면 ㅇㅇ중학교는 한 반 60여 명에 6반까지 있었다. 그리고 중학교 건물 뒤편에 한 건물로 된 달랑 두 반의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고등학교가 있었다. 실업계나 농업계가 아니라 인문계 고등학교였다. 가까운 시(市)에서도 툴툴거리는 비포장 도로를 버스로 굽이굽이 두 시간 가까이 들어가서야 나타나는 작은 농촌에 왜 인문계 고등학교를 설립했는지 내 좁은 식견으로는 지금도 아리송하다. 물론 지금은 폐교된 지 15년이 넘었다. 새까맣게 바글거리던 학생으로 넘처나던 중학교도 지금은 한 학년에 한 반, 그것도 30 명 정도만으로 겨우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당시 중학교 350명이 넘는 졸업생들은 고향을 떠나 도시로 흩어졌다. 가장 가까운 시(市)의 실업계나 인문계 고등학교로 입학하는 다수의 학생과 더 멀고 큰 도시로 입학하는 소수의 학생 그리고 구미 대구 등 공장이 많이 들어선 도시의 공장 부설 산업체 야간 고등학교로도 다수가 진출했다. 더 큰 도시로 나간 학생들은 일단 공부를 웬만큼 했고 가정형편이 괜찮거나 그 도시에 거두어 줄 친척이 있는 부류였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에 공부할 수 있는 산업체 고등학교로 나간 학생들은 대부분 어려운 가정 형편에 속하는 여학생들이었다. 그렇게 다 빠져나가고 남은 120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던 중학교 뒷건물 두 개 반을 겨우 채운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도시에 보내서 공부시키기에는 그럴 실력과 형편과 조건이 안되고 그렇다고 산업체에 보낼 만큼 아주 가난하지는 않은 어정쩡한 가정의 어정쩡한 학생들이었다.
나는 그 어정쩡한 가정의 어정쩡한 학생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섯 명의 자식을 낳아 기르는 가난한 아버지의 최대 목표는 다섯 자식을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내 똥구루마를 끄는 한이 있어도 고등학교까지는 시켜 주겠다"라고 큰소리치셨다. 그 고등학교가 다른 고등학교는 아예 배제시킨 그 작고 초라한 고등학교였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모두 그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도시의 여고에 진학하고 싶었던 나의 소망은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렇다면 아예 산업체 고등학교에 갈까도 고민했지만 그러기에는 나의 용기와 의지가 부족했다. 꿈을 좌절시킨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내 나약한 용기와 의지에 대한 자책 그리고 성에 차지 않은 고등학교는 나를 방황하게 했다. 학교에도 집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떠돌았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쯤 되어서야 나의 보잘것없는 미래가 보였다. 하다못해 주산 타자 자격증 하나 없이 오로지 고등학교 졸업장 한 개 들고 사회에 나가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언니가 다니는 전자 회사의 생산직 밖에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조금씩 다가왔다. 언니가 다니는 ㅇㅇ전자는 산간벽지 농촌에서도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유명한 거대 기업이었다. 그래서 생산직이라도 그곳에 다닌다는 사실은 당시의 농촌에서는 부모의 자랑거리였다.
부모님은 내가 졸업 후 언니가 다니는 전자회사에 취직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는 그 정해진 길을 가기보다 대학을 가야 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구체적인 계획이나 꿈같은 건 없었다. 그저 막연히 여대생이 되어서 캠퍼스를 누비며 데모도 하면서 젊음을 불태우고 싶어졌다. 120여 명의 고등학생 중 2년제를 포함한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이 10여 명 정도 였다. 뒤늦게 대학을 목표로 하는 부류가 되어 공부를 했다. 아무도 지지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아니 오히려 대학에 갈까 봐 내심 걱정하는 집안의 분위기 속에서 혼자 대입 시험을 보러 갔고 원서를 넣어 보았지만 떨어졌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3월 즈음. 꽃샘추위가 유난하던 그때 나는 처음으로 언니를 만나러 ㅇㅇ전자에 갔다. 당시 전역을 하고 집에 와 있던 오빠와 함께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오후 늦게 언니가 다니는 전자회사 앞에 도착했다. 언니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5년째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회사는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 만큼 크고 넓고 삭막해 보였다. 회사 앞 넓은 면회실에는 짙은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이 면회 온 가족이나 친구들에 둘러싸여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회사의 철문이 보이는 창가에 앉아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언니의 모습이 보였다. 짙은 파란색 작업복을 입은 언니가 육중한 회사 철문을 나오고 있었다. 봄바람이 일으킨 뿌연 먼지 속을 거대하고 삭막한 회색빛 건물을 배경으로 짙은 파란색 작업복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깨를 웅크린 스물다섯 살 언니가 종종걸음으로 걸어 나왔다. 오랜 세월이 흘러 많은 기억이 지워지고 뒤섞인 지금도 그날의 언니 모습은 이토록이나 선명하게 남아 있다. 멀리서 보이는 언니의 모습은 작고 초라했다. 명절에 고향에 다니러 왔을 때의 세련되고 도회적인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가까이 다가온 언니는 날씨 때문인지 작업복 때문인지 파리하게 추워 보이기까지 했다. 언니는 그곳에 다니면서 뒤늦게 대학에 간 첫째 오빠를 뒷바라지했다. 나는 언니가 가까이 다가오자 울음을 터뜨렸다. 지금도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울음을 터뜨릴 만큼 오랜만에 본 언니가 반가워서였을까? 아니면 처음 보는 작업복 차림의 언니 모습이 낯설어서였을까? 그도 아니면 그저 혈육에 대한 본능적인 연민의 발동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건 나의 지나치게 오만한 감정이었다. 언니는 누구보다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힘들다거나 다니기 싫다거나 하지 않았다. 얼굴이 예뻐서 회사 사보의 표지모델도 했고 조장이라는 직책도 맡고 있었고 같은 동료들과도 재미있게 지내고 기숙사 생활도 누구보다 즐겁게 하고 있었고 2년 늦게 자신의 라인에 입사한 남자직원과 목하 열애 중이기도 했다. 그런 언니를 보고 내가 왜 울음이 터졌는지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언니와 오빠가 난처해하는데도 나는 펑펑 울었다. 나의 의지로 자제가 되지 않는 나 자신조차도 당혹스러운 울음이었다. 언니 다운 따뜻함으로 좋게 달래던 언니도 나중에는 창피하다고 짜증을 냈다. 나의 울음은 멈출 듯하다가 다시 터져 나오고 또 멈출 듯 잠잠해지다가 다시 터져 나왔다. 멈춰지지 않는 그 질긴 울음으로 언니와의 만남은 어이없도록 짧게 끝났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나는 가끔 그날 막 스무 살이 된 내가 터뜨린 느닷없는 울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그건 아마도 나의 무의식이 은근히 뿜어낸 거부와 반항의 기운이 아니었을까 짐작되었다. 그리고 이제 고향과 부모를 떠나 혼자 나아가야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도 한몫했으리라.
그날 언니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나는 막연히 재수를 생각했다. 언니처럼 성실하게 살 자신이 없어졌던 것이다.
착한 나의 언니는 그런 나 때문에 기숙사를 나와서 나와 함께 생활할 방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한 1년의 재수생 생활을 나는 어이없게도 허랑 하게 보냈다. 식당 아르바이트를 시도했다가 일주일 만에 직원과의 불화로 그만두었었다. 공부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도서관과 학원을 오가는 시간 외에 도심 곳곳을 혼자 쏘다녔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이 전철로 쉽게 갈 수 있는 인천의 월미도였다. 혼자서 배를 타고 섬에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유한한 시간이 무한한 줄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그 소중한 인생의 좋은 기회를 얻고도 나는 왜 그렇게 어이없이 나태하고 안일하게 보냈을까 왜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 시절 그 시간 속의 나를 이해할 수 없다. 스무 살의 나를 내 몬 그 몽롱한 방황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주위의 모든 이들이 짐작하고 바라고 있던 안정된 길을 거부하고 허랑 하게 생활한 대가는 비참했다. 이듬해 나의 학력고사 점수는 형편없었고 나는 다시 한번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말았다. 누구보다 대학생이 된 동생을 보고 싶어 하던 언니에게 미안하고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원망할 누군가도 없었고 그 어떤 변명거리도 없었다. 오로지 내 탓이고 내 탓이고 내 탓이었다. 2년제 전문대학은 갈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 길을 또 가지 않았다. 언니가 다니던 전자회사에도 가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엉뚱한 길을 선택해 버렸다.
그 이후에도 나는 여러 번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고 바라는 안정된 길을 외면하고 엉뚱한 길로 들어섰고 그만큼 힘들고 고달팠다. 병을 얻었거나 배를 곯았거나 사기를 당해서 또는 고된 노동으로 힘들고 고달팠던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이 늘 고아처럼 정처 없고 고달팠다. 누군가는 배부르고 사치스러운 고달픔이라고 나무라겠지만.
나는 어느 한순간도 치열하게 살지 않았고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사느라 나는 늘 외롭고 고달팠다. 현실이 불만스러워 쉽게 꿈꿨고 대충 어정쩡하게 애써 보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또 쉽게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지난 시간 속 그 순간순간의 엇나감에 내 의지나 신념은 겨자씨 정도만이라도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그저 알 수 없는 힘에 등 떠밀려 살아온 것만 같다. 이런 생각은 어쩌면 그렇게 허랑 하게 산 시간에 대한 책임을 조금이라도 떠넘기고 싶어서인지도 모르겠지만.
지금도 나는 최소한 마음만큼은 편하고 안정될 수 있는 길을 버리고 또다시 외롭고 고달플지 모를 엉뚱한 미망의 길에 들어선 것인지도 모르겠다.
바라건대, 비록 미망의 길일지라도, 이제 그만 엇나가고 싶다. 이 길만은 끝까지 가보고 싶은 것이다. 방황으로 낭비할 시간이 이젠 진짜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