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찌니 Feb 27. 2024

남편은 나의 감정받이가 아닌데

  

  

  글쓰기 수업 마지막 주 2일 차.

  오늘의 주제는  '나는 주로 기쁨/우울/분노/불안/무기력에 지배되는 사람이다'라는 문장이다.


  이 주제를 받은 새벽 6시 이후 나의 머릿속은 온통 '나를 지배하는 정서'가 무엇인지에 집중되었다. 딱 꼬집어 내놓을 수 있는 메인 정서를 규정하지 못한 채 하루를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고 우울과 무기력을 꼽았을 것이다.  그런 날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좀 망설여졌다. 어떻게 그 우울과 무기력의 지배를 받던 날들을 벗어났냐고? 특별한 계기는 없었다. 그냥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었을 뿐이다.  가끔 찾아오더라도 이젠 지배당하지 않는다.


  오늘은 전자세금계산서 한 개를 발급해야 하는 날이다. 작년 한 해 동안 한 달에 한 개 꼴로 발급해 온 일이지만 디지털 세계를 두려워하는 나는 아직도 할 때마다 긴장한다. 가끔 금융인증서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작년에도 두 번인가 인증서가 사라져서 애를 먹었었다. 혼자서 낑낑대다가 126 국세상담센터에 전화했고 상담사의 설명도 따라갈 수 없어서 원격상담을 했었다.


  일단 전자계산서를 발급한 후에 뭐라도 하려고 아침 9시 무렵에 노트북을 켰다. 노트북 옆에 '세금계산서발행 순서'를 자세히 써 놓은 다이어리 노트를 펼쳐 놓았다. 국세청홈텍스에 들어가서 아이디와 비번을 입력하고 전자계산서 발급 - 건별 발급 - 아이디로그인을 했다. 세금계산서 양식이 떴다. 천천히 모든 사항을 입력했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금융인증서 비번만 통과하면 되었다.

  그런데 인증서를 찾지 못하겠다는 문구가 떴다. 내가 그토록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긴장과 함께 훅, 하고 짜증이 올라왔다. 왜 왜 찾지를 못하냐고... 지난 12월에는 바로 찾아오던 인증서를 왜 찾지를 못하냐고...

  바로 126 국세상담센터에 전화하기보다 웬만하면 스스로 해결하고 싶어 진다. 이런 쓸데없이 작은 고집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다행히 지난번 상담사와 통화로 인증서 찾기를 함께 할 때 노트해 둔 것이 있었다.

  인증서 찾기를 클릭하고 브라우저 인증서 등록하기 해서 세로로 세 줄 있는 거 클릭하고... c드라이브? 뭐지?  c드라이브를 아무리 클릭해도 반응이 없다. 왜 이러지? 뭐가 잘못된 걸까... 다시 처음부터... 또 안된다... 노트에는 c드라이브 다음에 사용자 ㅇㅇㅇ 하고 내 이름이 나온다고 쓰여 있는데... 다시 해 볼까... 아니 로그아웃하고 다시 시도해 볼까...

  노트북이 다시 시도되는 사이 또 찬찬히 노트를 읽어보았다. 상담사의 말을 놓칠세라 급하게 휘갈겨 노트한 내 글씨체는 나도 겨우 알아볼 정도다.  중요하다는 듯 별표를 해 놓는 장이 있다. '발급하기 후 인증서 사라졌을 경우 하드디스크 클릭 다운로드(오른쪽) 클릭 초록색 ------ 끝까지' 이건 또 뭔 말인가... 노트와 노트북 화면을 번갈아 보고 또 본다.


  그때 남편 전화가 왔다.

  "아 정말 짜증 나..."

  나의 첫마디였다.

  "뭐가? 또 왜?"

  사무실인 듯 남편의 목소리는 낮았다.

  "세금계산서 하는데... 인증서를 또 찾지 못하겠대... 아 진짜 짜증 나...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나는 너 잘 만났다는 듯이 맘 놓고 있는 대로 짜증을 부린다.

  "있는 인증서를 왜 못 찾아... 있겠지..."

  남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감정이 없다.

  "못 찾는다고... 못 찾겠다잖아... 아이 짜증 나... 어쩌라는 거야 진짜... 하라는 데로 다 하는데... 끊어!"

  남편이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인증서를 숨긴 것도 아니건만...나는 그렇게 짜증만 내다가 분노에 차서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결국 나는 126 국세상담센터에 전화했다. 상담사 모두가 상담 중이라 기다리시라는 멘트가 몇 번 이어지고 나서야 겨우 상담을 할 수 있었다. 나의 설명에 상담사는 인증서 기간이 만료되었을 경우에 보이지 않을 수 있으니 인증서를 재발급받으라고 했다. 나는 인증서 기간이 만료되었는지 안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가 없다고.. 그리고  저번에 인증서가 사라졌을 때는 상담사님이 하라는 데로 해서 찾았다고... 물러서지 않았다. 어렵게 한 상담이기 때문에 이 기회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틀림없이 또 혼자서 낑낑댈 것이 불 보듯 뻔하기도 했다. 그거는 본인이 직접 해당 은행에 들어가서 찾으셔야 돼요... 상담사가 그렇게 말했지만  혼자 하기에 자신이 없는 나는 상담사를 놓아주지 않았다.  찾아주시면 안 돼요?  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부탁했다. 상담사는 화면 하단의 원격상담을 클릭하라고 했다. 몇 번 화면이 왔다 갔다 하더니 인증서 만료일이 떴다. 보셨죠? 22일로 만료되셨네요... 상담사는 다행히 아직도 친절했다. 나는 다시 또 물러서지 않았다. 저... 죄송하지만 제가 잘 못해서 그러는데 재발급도 이렇게 원격으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죄송해요... 상담사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해당 거래 은행에 가서 전자세금금융인증서를 재발급받으라고 했다.


  은행에  직접 갈까 은행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또다시 시도해 볼까 잠깐 고민하다가 일단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또다시 아이디  비번 주민번호 전화번호 주소 사업자번호 통장이체번호 비밀번호 등록번호 등 입력사항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한 번에 되는 법이 없다. 두세 번 꼭 시도해야 한다. 중간에 또 뭐가 잘못됐는지 꿈쩍도 않는다. 몇 번을 하다가 결국 또 은행 상담사에게 전화해서 원격상담으로 해결했다.

  무사히 인증서 재발급을 하고 다시 국세청홈텍스에 들어가 전자세금계산서를 발급했다.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내주었다. 시간이 열두 시가 넘어 있었다.


  전자계산서 한 개 발급하는데 3 시간이 걸린 셈이다. 세 시간 동안 나는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았던 거다.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소파에 드러누웠다. 세 시간의 고투로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그렇게 누워 한참을 있자니 있는 데로 짜증을 낸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소파에 누운 채로 전화했다.

  "보낸 거 봤어? 빠지거나 잘못한 거 있나 자세히 봐... 겨우 했네 겨우... "

  "할 때마다 왜 그러냐? 결국은 할 거를... "

  "그러게 말이야... 아까 짜증내서 미안해..."


  나는 그렇게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일어난 후 먹다 남은 미역국을 데워 밥을 먹었다. 이제 책을 읽거나 글을 써야 하는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나는 다시 누웠다. 핸드폰 유튜브 숏폼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또 잠이 들었다. 중간에 깨어 일어나야지 생각만 하고 계속 누워 있었다. 온몸이 나른하고 날씨는 흐렸다. 그래서 나는 더욱 소파가 무기력의 바다인 양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를 다 보내버렸다. 다섯 시가 가까워져서야 겨우 일어났다. 무기력에서 탈출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샤워를 했다. 기분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오늘 하루 나를 지배한 정서는 짜증 분노 무기력이었다. 가끔 나의 기분은 순간순간 롤러코스터처럼 바뀐다. 짜증을 냈다가 금방 반성하고 화르르 분노했다가 또 금방 미안하다는 사과도 잘한다. 특히 남편에게 그렇다. 아니 생각해 보니 남편에게만 그러는 것 같다. 남편은 나의 감정받이가 아닌데... 이 글을 쓰면서 갑자기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나의 하루에도 몇 번씩 오락가락하는 다혈질 기분을 용케도 참고 견디어 여기까지 와 준 것 같다.


  얼른 마무리하고 남편이 좋아하는 봄동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눈으로 덮힌 새벽의 천변을 거닐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