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에는 두 개의 결혼식이 있었다. 남편지인 아들의 결혼식과 내 동창 딸의 결혼식. 두 곳 모두 꼭 가야 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내가 수원에서 하는 동창 딸의 결혼식에 갈까 말까 망설이자 남편이 기다렸다는 듯 용인에서 하는 자기 지인 아들의 결혼식에나 같이 가자고 했다.
당신만 아는 사람들 속에 끼여서 밥 먹기 싫어, 하고 거절했더니 자기도 지인 외에 아는 사람 없다고 했다. 축의금만 보내지 그래, 했더니 그 지인이 몇 번이나 같이 꼭 오라고 해서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요즘은 식사비가 워낙 비싸서 웬만하면 축의금만 보내고 참석하지 않아 주는 것이 예의라고들 하던데... 더구나 나랑 같이 가자고? 예의상 같이 오라고 한 거 아닐까? 했더니 그냥 같이 갔다 오자고, 길어질 것 같은 내 말을 잘랐다. 가끔 나는 별거 아닌(지나고 보면) 일을 꼬치꼬치 따져보고 캐묻는 버릇이 있는데 남편이 그걸 알고 일찌감치 커트해 버린 것이다. 결국 내 동창 딸의 결혼식에는 축의금만 보내고 남편과 함께 용인에 가기로 했다. 이렇게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떠들썩한 뷔페식당에서 혼자 앉아 우적우적 식사를 할 남편의 모습이 상상되어서였다. 전혀 모르는 남이라도 나이 든 남자가 혼자 앉아 밥 먹는 모습은 좀 짠한데 하물며 남편이 그럴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그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리고 같이 가서 같이 축하해 주고 같이 밥 먹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므로. 아직도 남편을 그렇게 사랑하냐고? 아니다. 사랑은 무슨 얼어 죽을.... 그저 연민일 뿐이다. 이 험한 세상 풍파를 함께 헤치고 살아온,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이제는 흰머리 성성한... 세상 가장 편하고 가깝고 만만한 대체 불가능한 인간에 대한 연민일 뿐... 저 유명한 소설가 '김훈' 님은 결혼생활을 오래도록 유지하게 하는 힘은 사랑, 이 아니라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연민, 이라고 했듯이...
남편보다 두 살 아래라는 신랑 아버지의 얼굴은 조명등과 메이크업과 꽃사지 때문인지 유난히 뽀얗고 환해 보였다. 머리는 또 유난히 풍성하고 빈틈없이 검었다.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것은 초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쩐지 신랑 아버지의 모습에 자꾸 눈길이 갔다. 남편의 머리는 백발. 뒷 목에서 올라오는 뒤통수 쪽이 조금 거무스름할 뿐이다. 남편은 한 번도 염색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이젠 머리가 검었을 때의 남편 모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들 결혼식에 백발의 머리로 서 있을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신도 욱이 결혼식 때는 머리 염색해야 할 것 같네... 신랑 조부 되시나요 하는 인사 듣기 싫으면...
라는 나의 말에 어쩌다가 염색하라는 말이 나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단호해지던 표정이 오늘은 좀 갈등하는 듯 애매해 보였다.
주례 없이 신랑신부가 함께 성혼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어 신랑 아버지의 축사, 신부 친구의 축사, 신랑 남동생의 축가가 이어졌다.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전에 아들을 번듯하게 잘 키워낸 자기의 와이프에게 감사와 사랑을 전한다는 신랑 아버지의 축사가 큰 박수를 받았다. 신부의 친구가 '십팔 년을 함께 한... 사랑하는 나의 친구야...'라고 축사를 시작하며 울먹일 때 나는 30년도 훨씬 지난 나의 결혼식과 그보다 더 오래된 내 친구가 떠올랐다.
스물몇 살 되던 해에 내 오랜 친구에게 사귀는 남자라고 지금의 남편을 소개해 준 날, 그날 그 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내 친구는 많이 울었었다고 훗날 고백했다. 분명 축하해 줄 일인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 했다. 허전하고 외롭고... 뭔가 우리들만의 시간이 저물어가는 듯 쓸쓸하더라고... 내 결혼식에서 글까지 잘 쓰는 그 친구가 축사를 했다면 틀림없이 울었을 텐데... 그때는 친구의 축사 같은 순서는 없었다. 오로지 주례의 길고 지루한 주례사가 있었을 뿐이었다.
축가를 부르기 전 '스승이면서 친구이면서 멘토인 나의 형... '으로 시작된 동생의 축사도 먹먹하고 좋았다. 가끔 좌중에 웃음소리도 나고 박수소리도 들렸다. 그 와중에 신랑의 어머니가 조심조심 눈물을 찍어내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목을 길게 빼고 신부 엄마를 보았다. 신부의 엄마는 울지 않았다. 내 결혼식 때는 나의 엄마가 눈물을 찍어냈는데 요즘엔 신랑 엄마가 울기도 하는가 싶었다. 그럴 것도 같았다. 요즘엔 결혼을 하면 대부분 처가 가까이로 가서 사니까. 내 주위를 둘러봐도 아들을 결혼시킨 친구는 아들이 너무 처가 위주로 산다고 섭섭해하고 딸을 결혼시킨 친구는 가까이 사는 딸과 사위와 손주마저 챙기느라 즐거우면서도 버겁다고 자랑과 하소연을 같이 했다. 남성상위시대는 끝나고 남녀평등시대를 지나 여성상위시대를 살고 있는 듯하니 결혼식장에서 신랑 엄마가 우는 시대가 도래한 건가... 아들 하나뿐인 나는 아들이 결혼할 때 울 것 같다. 상상만으로도 울컥한다.
한꺼번에 몰려들어 붐비는 식사시간을 피하기 위해 신랑신부의 퇴장 멘트와 함께 일어나 남들보다 일찍 식당에 갔다. 한식 중식 앙식 일식이 디양하고 푸짐히게 준비된 꽤나 비쌀 것 같은 뷔페였다.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 결혼식 때 에피소드 생각나는 거 있냐고 남편에게 물어보았다. 남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 안 나? 내 친구 ㅇㅇ가 내가 던진 부케 받다가 미끄러져 꽈당 넘어졌잖아... 그 얌전한 애가... 다른 곳도 아닌 결혼식에서 넘어져서... 사람들은 막 웃고 ㅇㅇ는 부끄러워서 친구들 뒤에 숨고 그랬었는데... 그게 기억 안 나? 그 당시 시청자들이 보내주는 재밌는 비디오 방송해 주는 티브이 프로가 인기였는데 거기서 가장 많이 나오는 게 결혼식날의 에피소드였고... 친구들 집들이 때 그 비디오 보여주니까 친구들이 방송국에 보내라고 틀림없이 채택될 거라고 막 그랬는데...
남편은 끝까지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그게 기억이 안 나는구나... 본인 결혼식 때 있었던 일인데... 그럼 우리가 결혼한 거는... 기억나?
나의 농담에 남편이 음식을 씹다 말고 피식, 웃었다.
마지막 디저트로 파인애플, 오렌지, 리치 등 과일 한 접시를 가운데 두고 먹고 있을 때 수원 동창 딸의 결혼식에 참석한 ㅇㅇ의 전화가 왔다. 내 엄숙한 결혼식 날 내가 던진 부케를 받아다 미끄러져 넘어진 그 친구였다. 스무 명 가까운 동창들이 참석하여 작은 동창회를 방불케 하는 그쪽 분위기를 대충 얘기해 주면서 누구누구 기억나냐? 걔가 왔네... 어쩌고... 글쎄 내가 첫사랑이었단다 어쩌고....
너 혹시 내 결혼식 때 너 부케 받다가 넘어진 거 기억나니?
대뜸 내가 물었더니
아니... 내가? 넘어졌어? 진짜? 내가 니 결혼식에서 부케 받다가 넘어졌다고? 나는... 부산역 주변을 헤매던 기억뿐인데...
아... 당사자마저 기억나지 않는다니... 나는 좀 절망스러워서 더욱 수다스러워졌다.
인생의 실수나 실패를 남기지 않으려는 깔끔한 성격의 너가 그런 큰 실수를 잊어버리다니... 부산역 주변 상가를 헤맨 거는 내 결혼식 때가 아니라 내 언니 결혼식 때였잖아... 언니도 부산에서 결혼식 했고... 기차타고 부산 가고 싶다는 너랑 같이 갔는데... 언니 결혼식 끝나고 기차 시간이 많이 남아서 부산역 주변 커피숍에 들어가 있다가 잠깐 졸았잖아. 밤기찬지 새벽 기찬지를 타서 둘 다 잠을 못 잔 상태였거든... 어머... 나 왜 이렇게 자세히 기억나는 걸까? 신기하네... 잠깐 졸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차 시간이 임박했지 아마... 그래서 급하게 커피숍을 나가서 기차역을 향해서 막 뛰었는데 아무리 뛰어도 기차역이 나오지를 않는거야... 이상하게 생각하며 뜀박질을 멈추고 헐떡거리며 주위를 돌이보고서아 알았지...우리가 뛰어온 방향은 기차역과 반대 방향이었다는 것을 ..
그래? 그랬어? 그 기억이 그 기억인가...
친구는 자신 없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근데 그때 말이야... 역의 반대 방향으로 막 뛰었던 그날... 우리가 예약한 그 기차를 탔었는지 못 탔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네... 놓쳤나? 놓쳤으면 그다음 기억이 어렴풋이라도 날 텐데...
글쎄... 내가... 요즘 기억이... 뒤죽박죽... 왔다 갔다... 무섭다...
그래... 하도 오래 살아서 기억이 뒤죽박죽 엉켰지? 흐흐흐...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 나라고 뭐 기억이 온전하겠냐...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도 오래전에 심각하게 이혼하네마네 할 때 다 없애버렸으니... 증거도 없고... 남편조차도 기억에 없다고 하니...
수다를 떠는 사이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열대과일 냉동리치의 두꺼운 껍질을 벗겨 먹기 편하게 놓아두었다. 나는 우리들의 기억을 미결로 남겨놓은 채 통화를 끝내고 남편이 까놓은 리치의 하얀 속살을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더 시간이 흘러 어느 결혼식을 접하거나 냉동 열대과일을 앞에 두게 된다면 나는 또 오늘을 기억해 내어 남편에게 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날 말이야... 용인인가 에서... 누구 결혼식에서... 당신이 내가 통화하는 사이 리치의 껍질을 다 벗겨 놓아 주었었는데... 기억나?
그때도 남편은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고 나는 그럼 우리 결혼한 거는 기억나? 하고 또다시 농담을 건넬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