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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Jun 30. 2024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비 그친 저녁 공원에 나가 앉아


얼큰감자수제비


  어제저녁부터 시작된 비바람이 오늘까지 계속되었다. 6월의 마지막, 한 해의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가면서 남은 절반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처럼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베란다에 나가 서서 비바람 치는 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수제비나 해볼까 하고 돌아섰다. 며칠 전 언니가 보내준 햇감자도 한 상자 있으니 감자 듬뿍 넣고 수제비를 해야겠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유튜브에 감자수제비 요리 숏폼 영상을  개나 시청했다. 밀가루에 물을 붓고 치대기 전 새벽 4시 넘어 들어온 아들의 방문을 열어보았다. 힘없이 펼쳐진 손안에 핸드폰이 저 혼자 깜빡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주고  조용히 다시 돌아 나왔다.   어제 등산을 다녀온 남편도 늦도록 일어나지 않았다.

  감자 양파 호박 대파 청양고추 등 수제비에 들어갈 재료를 준비했다.  알배기 배추도 꺼내 씻어놨다. 출출할 때 배추 전을 해볼까 싶어서다.  처음에는 맑은 감자수제비를 하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어 고추장과 고춧가루를 넣어 얼큰 감자수제비를 만들었다.

오전 11시 넘어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도 새벽에 들어온 아들도 부스스한 몰골 그대로 식탁에 나와 앉았다.  처음 해 본 수제비라 수제비 모양과 두께가 고르지 않고 좀 엉망이었지만 계란을 넣어서인지 부드러웠다. 특히 국물맛이  괜찮았다.

  맑게 끓이려다가 얼큰하게 했는데 괜찮지? 물었더니 둘 다 고개를 끄덕였다.

  감자가 맛있네... 아들이 말했다.

  그치? 며칠 전에  큰 이모가 보내준 건데 진짜 맛있지? 있다가 휴게소감자 만들어 줄게... 맛있을 때 해 먹어야 해... 싹 나고 파래지기 전에...

  휴게소 감자가 뭐야? 남편이 물었다.

  휴게소에서 파는 감자 있잖아... 소금 살짝 뿌려서 노르스름하게 구운 거... 내가 잘 사 먹었잖아...

끄덕끄덕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가득 찬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들고 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두고 비상구를 통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젖은 포도와 젖어  흔들리는 나무와 빗물에 씻겨 깨끗해진 자동차들 사이를 지나  나란히 서 있는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다가갔다. 쌓인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에 인상을 쓰며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섰다. 비에 젖고 바람에 흔들려도 뿌리 깊어 단단한 나무 곁을 지나다가 음식물 냄새가 배인  손가락을 문질러 닦았다.   금방 비에 씻기고 바람에 날아가겠지.  그러니까  괜찮지? 하며 동의를 구하는 뜻으로 나무를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다시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으로 들어섰다.


  욕심부리지 말자... 기대하지 말자... 이렇게 그냥 일상을 사는 거야... 이렇게... 그냥... 단순하게... 조용하게... 편안하게... 나에 대해서도  가족에 대해서도... 아니 이 생에서는 더 이상 기대하지도 욕망하지도 말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기형도의 시 빈집) 잘 가라... 잘 가라... 제발 멀리멀리 가서... 돌아오지 말아라...


눅진한 계단을 천천히 올라가는 내 머릿속 상념은 이런 것들이었다.


ㅡㅡㅡㅡㅡㅡ


  오후 여섯 시 무렵 밖에 나가려고 모자를 눌러쓰자 재택 업무를 끝내고 쉬고 있던 남편이 물었다.

  저녁은?

  아까 감자를 많이 먹어서  나는 안 먹을 거야... 수제비 좀 남은 거 먹던가 아님 먹고 싶은 거 시켜 먹어...

  알았어... 어디 가려고?

  가긴 어딜 가겠어 내가... 집 근처... 바람 좀 쐬고 올게... 다시  비 오기 전에...


  천변 입구에 출입을 금지하는 노란띠는 허술하게 늘어져 있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천변 산책길에 나와 걷고 있었다.  불어난 물의 유속이 빨라졌고 비 오기 전 탁했던 물빛이 선명해졌다. 어느 곳엔 무성한 물풀이 물의 표면을 덮고 었다. 천변으로 내려가  산책로를  걷다가 상가로 이어진 계단을 올라가  아들이 있을   단골 카페를 기웃거려 보았다. 아들이 늘 앉는 창가 자리에 아들의 가방과 반쯤 남은 커피가 담긴 커피잔이  보였다. 열지도 않은 가방을 그대로 두고 커피도 마시다 말어디에 갔을까... 화장실에 갔나 담배 피우러 갔나... 카페 주변을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들이 원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천변으로 내려갔다. 천변 끝에 있는 대형 할인마트에 가볼까 하다가 천변 건너  공원으로 올라섰다. 고층의 아파트에 둘러싸인 작은 선사유적공원이다. 짚을 엮어  만든 서너 개의 움집이 초록 잔디와 하얀 개망초꽃풀에 둘러싸여 있었다. 개를 산책시키며 느릿느릿 움직이는  몇 명만이  있었다. 

  나는 자갈길을 걸어 공원의 끝에 놓인 돌벤치에   원을 등지고 앉았다. 무릎 높이까지 자란 하얀 개망초꽃과 붉은토끼풀(꽃검색으로 찾아  알아낸 이름, 붉은색이 아니라 보라색인데...) 웃자란 잔디가 저녁바람에  부드럽고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주유소와 소방서와 행정복지센터와 ㅇㅇ당 베이커리카페 간판들이 보였다. 사이사이 초여름 푸른 숲과 하늘이 있었다.  그리고  자동차들이 내는 일정한 기계음 속에 이따금 커다란 음악소리와 함께 굉음을 토해내는 오토바이 가 지나갔다. 가끔 산책하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등 뒤에서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털이 무성한 흰 개가 내 발치까지 다가와

 킁킁거리다가   발을 들고 개망초꽃 속에 오줌을 갈기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갔다. 하늘에선  먹구름이    흰구름에 쫓겨 달아나고 있었다. 어둠이 오기 전 하늘이 잠깐 밝아졌다,   물의 흐름처럼 눈 앞에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어둠이 장막처럼 서서히 내려오면서   고층의 아파트들과 가로등과 달리는 차들이  일제히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다. 어둠은 불빛이 닿지 않는 구석구석 아주 미세한 곳까지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고 파고들었다. 숲과 건물과 키가 큰 나무의 형체가 뚜렷해지면서 내 눈앞에서 흔들리는 풀과 꽃들의 형체가 지워져 갔다. 내가 침입자라도 되는 듯 모기가  공격을 해왔다. 허벅지에 앉은 까만 모기를 손가락으로 눌러  죽였다. 바람이 서늘해서인지 모기는 힘이 없었다. 팔뚝에 앉은 모기도 쉽게 눌러 죽였다. 발목 근처가 가려웠다. 어둠이 짙어지고 바람이 서늘해지고 달아났던 먹구름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나는 모기에 공격당한 다리를 긁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잘 있거라...


나는  어둠을 몰아낸 불빛이 만들어준 긴 그림자를 끌며 천변을 건너  느릿느릿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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