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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Jun 19. 2024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무서워....

유투브 따라 했다가  실패한 찬밥스팸김밥 ㅡ너무 두껍게 한 것이 실패의 원인


  쿠팡에서 배달된 상품들을 들여놓으려 문을 열었다가 실내복 차림으로 난간에 서 있는 옆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어색한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뒤늦게 좀 서둘러 닫은 것 같은 자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  나는 지금 한창 나돌아 다닐 수 있는  젊고 건강한 나이일  것이고 때문에 젊은 여자? 가 왜 저렇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나 한심해 보이기도 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남들의 시선에 조금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가 후줄근한 차림으로 한낮에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잠깐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몸이 허락하는 한 나가서 돈을 벌어라 돈을 벌어라 그리고 그 돈으로 먹고 마시고 관광하며 여행하며 즐겨라 즐겨라 하고 등을 떠밀어대니까. 그 시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살기란 크든 작든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내 본 사람 중의 한 명이 된 것이고.



도서관에 갈까 하다가 오늘은 어제 빌려온 책 (박연준, 듣는 사람)을 읽기로 하고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밖은 30도가 넘는 한여름 날씨라지만 집안에서는 아직 선풍기바람만으로도 쾌적했다.

고전을 소개하는 책을 적지 않게 읽은 듯 하지만 시인이 쓴, 특히 박연준 시인이 쓴 책이라 그런지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싶게 하고 읽지 않은 책은 꼭 읽어보리라 마음먹게 하는 힘이 강했다.  실제로 어제부터 '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디오북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장소설이지만 '성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 걸 찾으려면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다만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거나 좌충우돌이 전부인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지나왔다면 일독을 권한다. 혹은 오두막에서 숨어 사는 걸 꿈꾸거나 기성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면, '한겨울에 강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과 금세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울지도 모른다. (29 p) -


이 대목을 읽고 어찌 다시 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오두막에 숨어 사는걸 꿈꾸고 한겨울에 강이 얼면 오리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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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180p)ㅡ페르난두 페소아'문장을  읽으면서는 괜히 턱, 하고 숨이 막혔다.  이런 문장...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토요일에는 동창 6명으로 만들어진 등산모임 '더 팔오(85세까지 등산하자는 뜻)'의 정기 산행날이다.  이 단톡에 부모님 생신날이어서 참석이 어렵겠다는 한 친구의 톡이 올라왔다. 아쉽다는 답글을 달았다. 또 한 친구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산행은 함께 하지 못하고 뒤풀이에나 참석할 것 같다는 톡을 올렸다.  친구는 골프 모임만도 서너 개가 있을 정도로 이런저런 모임이 많다. 언젠가 무슨 얘기 중에 모임이 너무 많아 힘들다길래 모임을 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마침 좀 지루하던 참이어서 장난 삼아 '내가 너 모임 너무 많다고 모임 몇 개 탈퇴하라고 했지!!!!' 하고 올렸더니  대뜸  자기의 6월  한 달 스케줄표를 찍어 올렸다. 주말마다 약속이 빼곡했다. 그 일정 중에는 처가에 매실 수확, 본가 엄마 당번 일정도 있었다. 이 친구의 엄마는 거동이 불편한데도 시골집에 혼자 계시겠다는 고집을 부려서 형제들이 당번을 정해  주말마다 돌아가면서 내려가 보살피고  있다.   사정을 알고 있기에 '내가 못살겠다 힘들어서 ' 라고 쓴 스케줄표 밑의 글이 엄살로만 읽히지 않았다.



정말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철없는 농담을 한 것 같아 다시  한번 더 답글을 올렸다.   '하긴... 남자들의 빡빡한 스케줄은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뜻하기도 하지...처가와 본가와 모임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너가 기특하고 착하다...쓰담쓰담...'

그런 다음 뭔가 또 미진한 듯하여 올린 것이 저 문장이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그러니까  지금은 힘들어도 기꺼이 살아야겠지...   

은 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박연준 시인의 말대로 설명 따위 필요 없는 문장일 것 같아서였다.


한참 후 그 친구의 답글이 올라왔다. 짧지만 강력한 세 글 자...


'무 서 워!!! '


#호밀밭의파수꾼

#박연준듣는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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