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에서 배달된 상품들을 들여놓으려 문을 열었다가 실내복 차림으로 난간에 서 있는 옆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여느 때처럼 어색한 미소와 함께 눈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뒤늦게 좀 서둘러 닫은 것 같은 자각이 들었다. 그의 눈에 나는 지금 한창 나돌아 다닐 수 있는 젊고 건강한 나이일 것이고 때문에 젊은 여자? 가 왜 저렇게 집에만 틀어박혀 있나 한심해 보이기도 할 것 같아서였을 것이다 무의식 중에.
괜한 자격지심일 수도 있겠지만 남들의 시선에 조금 위축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가 후줄근한 차림으로 한낮에 공원에서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것을 볼 때 잠깐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 사회는 몸이 허락하는 한 나가서 돈을 벌어라 돈을 벌어라 그리고 그 돈으로 먹고 마시고 관광하며 여행하며 즐겨라 즐겨라 하고 등을 떠밀어대니까. 그 시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살기란 크든 작든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런 용기를 내 본 사람 중의 한 명이 된 것이고.
도서관에 갈까 하다가 오늘은 어제 빌려온 책 (박연준, 듣는 사람)을 읽기로 하고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밖은 30도가 넘는 한여름 날씨라지만 집안에서는 아직 선풍기바람만으로도 쾌적했다.
고전을 소개하는 책을 적지 않게 읽은 듯 하지만 시인이 쓴, 특히 박연준 시인이 쓴 책이라 그런지 읽었던 책은 다시 읽고 싶게 하고 읽지 않은 책은 꼭 읽어보리라 마음먹게 하는 힘이 강했다. 실제로 어제부터 '호밀밭의 파수꾼'을 오디오북으로 듣기 시작했다.
-이 책은 성장소설이지만 '성장'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런 걸 찾으려면 다른 책을 읽어야 한다. 다만 자신이 쓸모없게 느껴지거나 좌충우돌이 전부인 어느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지나왔다면 일독을 권한다. 혹은 오두막에서 숨어 사는 걸 꿈꾸거나 기성 사회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면, '한겨울에 강이 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갈까?' 궁금해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과 금세 사랑에 빠질 것이다. 어느 페이지에서는 울지도 모른다. (29 p) -
이 대목을 읽고 어찌 다시 읽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까 나는 아직도 오두막에 숨어 사는걸 꿈꾸고 한겨울에 강이 얼면 오리들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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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180p)ㅡ페르난두 페소아'는 문장을 읽으면서는 괜히 턱, 하고 숨이 막혔다. 이런 문장...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토요일에는 동창 6명으로 만들어진 등산모임 '더 팔오(85세까지 등산하자는 뜻)'의 정기 산행날이다. 이 단톡에 부모님 생신날이어서 참석이 어렵겠다는 한 친구의 톡이 올라왔다. 아쉽다는 답글을 달았다. 또 한 친구는 다른 일정이 있어서 산행은 함께 하지 못하고 뒤풀이에나 참석할 것 같다는 톡을 올렸다. 이 친구는 골프 모임만도 서너 개가 있을 정도로 이런저런 모임이 많다. 언젠가 무슨 얘기 중에 모임이 너무 많아 힘들다길래 모임을 줄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마침 좀 지루하던 참이어서 장난 삼아 '내가 너 모임 너무 많다고 모임 몇 개 탈퇴하라고 했지!!!!' 하고 올렸더니 대뜸 자기의 6월 한 달 스케줄표를 찍어 올렸다. 주말마다 약속이 빼곡했다. 그 일정 중에는 처가에 매실 수확, 본가 엄마 당번 일정도 있었다. 이 친구의 엄마는 거동이 불편한데도 시골집에 혼자 계시겠다는 고집을 부려서 형제들이 당번을 정해 주말마다 돌아가면서 내려가 보살피고 있다. 그 사정을 알고 있기에 '내가 못살겠다 힘들어서 ' 라고 쓴 스케줄표 밑의 글이 엄살로만 읽히지 않았다.
정말로 힘들어하는 친구에게 철없는 농담을 한 것 같아 다시 한번 더 답글을 올렸다. '하긴... 남자들의 빡빡한 스케줄은 경제적 여유와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뜻하기도 하지...처가와 본가와 모임까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 너가 기특하고 착하다...쓰담쓰담...'
그런 다음 뭔가 또 미진한 듯하여 올린 것이 저 문장이었다.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밤이 오고 마차가 도착하리라'
그러니까 지금은 힘들어도 기꺼이 살아야겠지...
이 글은 올리려다가 그만두었다. 박연준 시인의 말대로 설명 따위 필요 없는 문장일 것 같아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