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영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by 찌니

새벽 세 시가 넘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제 월요일은 이웃 시의 ㅇㅇ도서관과 전철을 타고 가야 하는 ㅇㅇ 중앙도서관은 휴관일이어서 ㅇㅇ 행정복지센터 4층에 위치한 ㅇㅇ 작은 도서관에 갔다. ㅇㅇ작은 도서관은 금요일이 휴관일이고 운영시간은 오후 6시까지이다. 어제도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두 시간 가까이 엎드려 잤다.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서 이제 조금씩 지쳐가는 건지 요즘 들어 부쩍 도서관에서 엎드려 잠자는 시간이 길어졌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엎드려 있을 때도 많고 멍하게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시간이 많다. 기분이 가라앉고 무기력하여 누군가에게 선물로 받았으나 먹을 필요성을 못 느꼈던 발효홍삼음료 스틱을 찾아내서 이틀 째 음용하고 있다.


어제는 또 오후 6시에 도서관을 나와서 뜨거운 순댓국을 땀을 흘려가며 먹었다. 그리고 단골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을 읽었다. 내 옆 테이블에서는 내 또래의 중년 여자 세 명이 큰 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보험 얘기를 하고 건강 얘기를 하고 음식 얘기 자식들 얘기를 했다. 나는 내가 떠나온 세계를 그리워하며 훔쳐보듯 가끔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그들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그들은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카페를 나와 천변으로 내려갔다. 활기차게 밤산책이나 밤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를 노트북과 책이 든 무거운 가방을 메고 페잔병처럼 터덜터덜 걸어 귀가했다.


9시 반 넘어 귀가한 아들에게 냉동밥을 데워서 어제 먹고 남은 시래기된장국과 자장소스를 얹어 주었다. 아들은 밥을 먹으면서 동기 한 명이 또 퇴사를 할 것 같다는 말을 했다.

" 힘들게 취직했을 텐데... 얼마나 힘들었으면... 한 달 연수까지 받고 입사 5개월 차면 웬만큼 업무도 익었을 텐데... 회사로 봐서도 손해 아닌가.. 업무가 아니라 사람 때문이겠지?"

"그렇지.... 거래처가 멀어서 교통비가 많이 나온 건데 교통비 많이 나왔다고 뭐라 그러고... 뭐 그런 게 쌓인 거지... 자존심 상하게 하고..."

"넌 괜찮아?"

"난 팀을 좀 잘 만난 거 같아..."

"다행이네... 아무리 힘들어도 그 취준생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

"그럼.... "

"그래..... 돈 버는 게 그래.... 참.... 힘들지.... 사람 때문에 힘들어... 그래도 요즘엔 평생직장은 없으니까.... 너도....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알아 알아 엄마.... 나도 대비하고 있어..."


남편은 12시가 넘어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우적거리듯 들어왔다. 아들의 방문을 먼저 열어보았다. 열린 문으로 아들이 코 고는 소리가 조그맣게 새어 나왔다. 아들의 방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아준 후 옷을 훌렁훌렁 벗어재끼며 옆에 서 있는 내게

"아우씨 요즘 경조사가 너무 많아... 오늘도 두 곳이나 보냈고 내일은 용인까지 가봐야 해.."

하면서 투덜거렸다. 유난히 지치고 피곤해 보여서 맘이 짠해졌다. 죄책감도 밀려들었다.


오늘은 12시 무렵 이웃 시의 ㅇㅇ도서관에 왔다. 최은영의 '밝은 밤'은 결국은 고단한 삶을 살아온 여자들의 밝은 밤처럼 따뜻한 소설이었다. '밝은 밤'을 반납하고 '쇼코의 미소'를 서가에서 가져와 앉았다. 책을 읽다가 문득 창 밖에서 어떤 움직임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바람이 없어 미동도 않는 창 밖의 나무들 사이에서 노란 잎 서너 개가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참 보고 있으면 또 기다렸다는 듯 아직은 무성한 초록잎들 사이에서 서너 개의 노란 잎들이 팔랑팔랑 떨어져 내렸다. 가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릴 땐 더 많은 잎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 초록잎들 사이의 서너개의 노란 잎의 가볍고 고요한 낙하를, 나는 어쩐지 애잔한 마음으로 오래 바라보았다.


'쇼코의 미소 ' 34페이지

꿈. 그것은 허영심, 공명심, 인정욕구, 복수심 같은 더러운 마음들을 뒤집어쓴 얼룩덜룩한 허울에 불과했다. 꼬인 혀로 영화 없이는 살 수 없어, 영화는 정말 절실해, 같은 말들을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제대로 풀리지 않는 욕망의 비린내를 맡았다. 내 욕망이 그들보다 더 컸으면 컸지 결코 더 작지 않았지만 나는 마치 이 일이 절실하지 않은 것처럼 연기했다.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영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나는 소설의 서사나 사건 전개 보다 문장을 읽고 문장에 마음을 빼앗기는 편이다. '쇼코의 미소'의 이 문장에도 마음을 빼앗겼다. 분명 오래전 읽었는데 처음 읽는 문장 같았다. 그때도 마음을 빼앗겼대도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을 리 없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 현재, 오늘, 유독 이 문장이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ㅡ재능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영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ㅡㅡ


특히 이 문장이 꼭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늘 가슴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숨어 있는 뱀같은 문장... 이런 식으로 가끔 혀를 날름날름 내밀면서 독을 바르지... 포기하지 않을 만큼...

차라리 포기할수 있을 만큼 많은 독을 뿜어 내 심장을 마비시켜 준다면 더 나을텐데...


생각해 보니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섯 형제 중 유독 나에게만 강조한 말씀이 있었다.


허영심을 버려라 분수에 맞게 살아라.....


아버진 나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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