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라, 연자방아가 아니었다. 연자방아 바로 아래 너럭바위에서 플라스틱 소주병을 옆에 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 풀치는 나를 보고 배시시 웃었다.
“누님! 옛날에 한가락했는가 봐요?”
그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나를 보면서 말했다.
“누가 뭐래도 누님이 제일 예쁘더라.”
‘이건 뭔 소리여.’
풀치는 내 말이 끝나자, 곧바로 고개를 박고 트로트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큰 소리로 따라 불렀다.
“느그 집 놔두고 왜 여기서 떠드는 거예요?”
“내가 집이 어디 있어!.”
성길씨가 어느 틈에 마당으로 나왔다. 수돗가 의자에 앉아 웃고 있었다.
풀치 고개가 점점 밭으로 기울어졌다. “어 어” 그가 밭으로 털썩 떨어졌다. 텃밭에 상체 반을 걸치고 꼬꾸라진 채로 잠이 들었다. 내가 밤낮으로 들여다보면서 키운 상추인데. 참말로 지랄도 가지가지했다. 풀치를 끌어내려다가 그의 옷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정말 맘 같아서는 삽으로 팍 퍼다가 저 계곡 아래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풀치가 저렇게 자빠져 있으면 풀치를 깨워 무슨 조치를 해야 하는데 성길씨는 너럭바위 근처도 오지 않았다. ‘별일이다. 별일’ 나 혼자 성길씨를 향해 중얼거렸다.
112를 부르려다 그만두었다. 풀치를 신고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한테 대든 것도 아니고 어디를 부순 것도 아니고 성길씨도 가만히 있는데. 112 부르려고 맘만 먹었는데도 죄지은 것이 없이 이렇게 쪼는데 사고를 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다음 날 아침 풀치는 맨 정신으로 성길씨와 담배를 나눠 피고 있었다. ‘아이고 저 구신!’ 나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산이를 찾으러 마당 밖으로 나갔다.
“ 그 동생들 다 잘 놀던데요.” 풀치가 내 뒤에 대고 말을 했다.
그제야 며칠 전 우리가 평상서 춤추고 놀 때 풀치가 연자방아 뒤쪽에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 동생들요? 옛날에 좀 놀았죠.” 이 말을 하고 씩 웃었다. 과거에 한 가닥 안 한 사람 없겠지만 나를 알아주는 것 같아 여유를 갖고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이날 웃어주었던 것이 문제였다.
그날 이후로 풀치는 술에 취하면 거리낌 없이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다. 연자방아에 앉아 있다가 술에 너무 취해 몸을 못 가누면 마당에서 뻗었다.
하 이러다가 평상도 무사 못하겠구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풀치가 마당에 누워있는 게 신경 쓰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여기저기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한 곳에서 자빠져 자니, 골칫거리 하나 해치웠구나,라고 안심하는 듯했다.
술에 취하지 않을 때 그는 순둥이였다. 성길씨가 시키는 대로 일도 잘했다. 길 건너 창고에서도 허드렛일을 하였다.
풀치는 밀차로 박스와 고물을 실어 날랐다. 하루는 한쪽 바퀴가 떨어져 나간 여행 캐리어를 어디서 주워와 나에게 가져왔다. 나에게 뭔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 엿보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풀치는 집도 없고 애인도 없고 계좌도 없고 나와 다를 것 없었다.
나는 풀치가 술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일 때 그에게 “술 쫌만 마셔요”라고 했다. 그리고 술 마실 시간에 일해서 보증금을 만들어 여기서 이사 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