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서서 전나무에 손을 흔들고 텃밭을 들여다보았다. 남한산성 연두빛깔은 찬바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을을 휘감고 내려온다. 곧 초록이 들이닥칠 기세다. 밭둑이며 마당가에 서 있는 살구나무 호두나무 다래나무 대추나무 새순들이 바람 따라 살랑거렸다.
성길 씨 텃밭에는 곰취 취나물 상추 고들빼기 하얀 민들레가 모양을 갖추었다. 뜯어먹어도 될 정도다. 내 상추도 제법 폼을 잡고 있다.
밭을 한 바퀴 들여다보고 난 후 평상에서 신문을 펼쳤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선거도 끝났다.정치면을 지났다. 새 우는 소리가 정신 사납게 들렸다. 신문을 덮었다. 평상에 앉아 팔짱을 껴안고 멍때리며 산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 맞은편 밭으로 가려면 뒷집아저씨가 얼기설기 만들어 놓은 아슬아슬한 쇠 다리를 건너야 한다. 밭이 끝나는 지점에 수백 년은 족히 된 듯한 전나무 한그루가 우렁차게 서 있다. 위용이 넘치는 전나무를 볼 때마다 손을 흔들며 마음속으로는 고개를 숙인다.
“하이! 오늘도 하늘 안 무너지게 지켜줘 고맙소.”
바람이 좀 잦아들었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새만 나뭇가지를 옮겨 다닐 뿐이다. 지금 시간만큼은 돌을 베개 삼고 샘물로 양치질을 하고 사는 것처럼 사는 게 누구 덕이든 그냥 고맙다.
하지만 세상 평온하다가도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털컥 내려앉는다. 새벽에 눈을 뜰 때도 마찬가지다. 특별한 일도 없는데 왜 끝 모를 불안이 찾아오는 것일까. 하는 일 없이 그냥 시간을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것일까. 나만 이러는 것일까.
그래도 이렇게 멍 때리는 동안 다시 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느새 참새 울음소리가 노랫소리로 들린다.
내가 아끼고 미워하고 증오하는 사람이든 사물이든 언제부턴가 하나둘 떠나갔다. 나도 누군가한테 멀어졌을 것이고 내가 밀어내기도 했을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은 것들이 떠나갈 것이다.
그렇다고 미리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새를 부르려고 입을 모아 휘파람을 불어 본다. 쥐뿔 나게 연습을 해도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휘파람 소리다. 닭똥구멍처럼 입을 내밀어 쯔쯔쯔 구구구 까악 까악 온갖 소리를 냈더니 ‘저거 뭔 소리데 술 덜 깼나 봐’ 새들은 놀래 날아가거나 다른 나무로 자리를 옮겼다. 참새 한 마리가 마당까지 내려왔다.
“너만 먹어라” 평상에 땅콩 한 알만 두고 자리를 피했다.
참새들이 “소갈딱지 하고는 겨우 한 알이냐?” 비웃는 거 같았다. 다시 가서 한 움큼 더 던져놓고 텃밭 옆 너럭바위에 앉았다.
나는 이곳에 살면서 머리 어깨에 땅콩을 올려놓고 새가 날아와 물고 가기를 바랐다. 한술 더 떠 입술에 땅콩을 물고 있으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이 꿈은 접어야 했다.
어느 틈에 강아지 산이가 내 옆자리로 와 발로 나를 끌어당겼다.
“이모 걱정 있어? 내가 있잖아요” 서로 눈빛으로 속마음을 주고받았다. 산이는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평상에 앉아있는 산이의 눈에 노을이 물들어갔다. 날마다 떨리는 발음을 확인시키는 공손한 새들의 저녁이다. 완전히 어둠이 내리면 상추밭 가에서 혼자 펑펑 울다가 거름처럼 푹푹 썩고 싶다. 노을 앞을 살구꽃이 흘러간다. 내 걸음은 더도 덜도 말고 꼭 흩날리는 살구꽃만큼만 움직이고 싶다. 어둠 속에서 앞산이 허리를 세운다. 마지막 인사를 할 줄 모르는 새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