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불량품들의 사계 Dec 17. 2023

불량품들의 사계

농땡이 42

농땡이



                                  

그날 수국 위에 올려놓은 귀뚜라미는 잘 있는지? 가지런한 빗속에서 귀뚜라미 까마귀 물까치가 울고 있다.


비가 오면 무조건 좋다. 비가 와서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는 미안하다. 유튜브를 켰다. 말러의 ‘나는 세상에 잊히고’ 찾아들었다. 몸살을 앓던 배추와 무가 어느새 꼿꼿이 자리를 잡았다. 빗방울이 거세졌다. 노래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보드카가 생각이 났다. 문득 길 건너 술주정뱅이 풀치가 생각났다. 술고래는 풀치 한 사람으로 족 하자. 그리고 내가 어두워지고 싶지 않았다. 음악이 흘러나오던 블루투스를 껐다.     

티브이를 켰다. 아무 일 없이 식충이처럼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뒹굴었다. 소파에 올라갔다가, 리모컨으로 1번부터 999번까지 채널을 오르락내리락했다.      

일어나 미역국을 데웠다. 김치와 갈치를 식탁에 차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국만 있고 밥그릇이 없다. 분명히 식탁에 올려놨는데... 방금 전 동선을 따라 움직여 봤다. 그래도 밥그릇은 없다. 심지어 화장실에도 가보았다. 하도 정신머리가 없어서 혹시 화장실에 무심코 들고 갔나 싶어서였다. 분명히 어젯밤에 해놓은 밥을 숟가락으로 퍼서 공기에 담은 기억이 나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놈의 밥그릇이 발이 달렸나?”

혹시 하고 미역국을 숟가락으로 저었더니 밥알이 떠올랐다. 밥을 담은 그릇에 미역국을 퍼담아 놓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밥그릇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돈다 돌아.”     

밥을 먹고 마루에 누웠다. 건전지 두 개가 식탁 밑에 굴러다닌다. 약봉지는 쇼핑백 안, 검정비닐 속에서 삐져나와 있다. 고개를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파리 새끼 너덧 마리가 달라붙어 있다. 몸을 옆으로 돌렸다. 가스난로 위에 아르바이트할 때 필요한 쑥 가루 담아놓는 통이 올려져 있다. 그러니까 책상 난로 식탁 오디오 위에 액자 붓 약통 블루투스 책 크리넥스 소독제 손거울 모과 병따개 등 자질구레한 물건이 빼곡히 올라앉아있다.

‘아! 집안 꼴이,,,’ 너무 어수선해 일어나 앉았다.

게다가 명희 아들 지원이가 이사 갈 때 준 밥상에 노트북 신문 소형 마이크 비타민 손 수술하고 감았던 붕대까지 갑자기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다.

‘그래 혼자 사는 게 좋다는 것이 뭐겄냐 이런 거지’ 밥 달라고 조르는 사람이 있어, 설거지 안 했다고, 밥 먹자마자 누웠다고 잔소리하는 사람 있냐. 애들이 어지럽혀 놓은 것 뒤치다꺼리하다가 허리 휘일 있냐. 이거면 됐지. 그래도 치워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 꼴이 보기 싫어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마당과 평상에 호두가 떨어져 있다. 비가 그렇게 퍼부었는데도 썩지 않았다. 나는 그동안 주워 모은 호두(성길 씨는 뭐든지 떨어진 거는 줍지를 않는다. 주인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같다)와 방금 주운 호두를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씻어 바구니에 담았다. ‘날 좋은 날 다 두고 하필 비 오는 날 이 지랄을 하세요?’ 너는 내게 물을지 몰라도 내가 본래 이렇다. 뭐가 꽂혀야 하고 그때그때 생각이 나야 움직인다. 방안 꼴이 생각나 처마밑에서 어정거리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치울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식탁에 있는 약봉지에서 약을 꺼냈다. 항생제와 눈에 좋은 루테인 키토산 혈압약 등을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고 고개를 뒤로 젖혀 삼키는 순간, 평상 위로 호두가 쿵 하고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명치끝이 쿵 내려앉았다. 불안하다.

아무리 농땡이는 쳐도 무언가 꼭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있는 것 같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사소한 불안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요 며칠 전 점심을 먹다가 밭에 풀이 눈에 띄어 뽑고 와서 먹었다.

지향샘이 “ 가만히 있지를 않네.” 그녀는 내가 살 안 찌는 이유를 알겠다고 했다.

“나 부지런하지?”

“아니 산만해.”     

정신이 산처럼 굳건해야 하는데... 멍 때리고 농땡이 쳐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오히려 불안만 발바닥에서 눈썹까지 차올라올 뿐이다. 내가 농땡이를 치는 동안  불안은  소리 없이 찾아들 것이다. 그렇다면 머물다 가시라.  내 몸인 양 같이 가겠네.

                 

작가의 이전글 불량품들의 사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