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으로 가득 채운 방

by 물오름달

골목길마다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나의 좋은 시절이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할 때마다, 아직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언젠가 건너편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면 같은 자리에 오래 서 있어도 힘들지 않았다.


혼자 가만히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는 지나는 차라도 구경하는 게 덜 지루했다. 그것도 귀찮을 땐 그냥 좋아하는 노래나 들으며 궁상을 떨었다.

내 인생에는 한 바퀴가 유난히 긴 신호가 많았다. 몇 걸음 걷다 멈춰 서기를 반복하다 보니 저절로 나 자신과 대화하는 시간이 생겨났다.


어렸을 땐 내가 뭘 좋아하는지, 취향에 대한 생각이 별로 없었다. 물건도 주변에서 좋다고 추천하는 거나 리뷰가 많은 순으로 대충 골라 구매했다. 마음에 안 들면 좀 쓰다 내다 버릴 생각이었다.

일상에서도 이렇다 할 취미가 없었다. 손재주가 없어서 요리나 만들기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고, 몸 쓰는 일을 하기엔 체력이 받쳐주지 않았다. 가뜩이나 삭막한 일상이 주인 따라 더 시들어갔다.


그맘때쯤 인터넷에서 이런 글귀를 봤다. '취향은 그 사람을 이름 대신 부를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인스타 피드만 봐도 해시태그가 스무 개씩은 붙는데, 정작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욕심이 났다. 마음의 방을 나의 취향으로 꽉 채우고 싶다는 욕심.


그때부턴 '내 취향은 뭘까?' 하는 고민을 달고 살았다. 영화 한 편을 볼 때도 그냥 총평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정확히 어느 부분이 좋았는지 파일을 만들어 정리했다. 이 부분에서는 대사가, 이 부분에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이 부분에서는 노래가, 이 부분에서는 연출이 좋아서 전체적으로 괜찮은 영화였다고.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이 영화가 꽤나 내 취향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들과 감독이 새롭게 생겼다. 아마 그들이 후속작을 내놓는다면 일정을 모두 미뤄서라도 달려갈 만큼 열성적일 거다.


평소에 잘 보지 않았던 웹소설에도 발을 들였다. 처음엔 너무 많은 장르와 키워드 때문에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는데, 작품 설명과 프롤로그를 여럿 뒤적이고 나서야 내가 가슴 절절한 로맨스를 원한다는 걸 깨달았다.

캐릭터의 멋진 성장과 짜릿한 복수보다는 불공평한 사랑과 한쪽으로 기운 애정에 더 마음이 갔다. 가상의 캐릭터들이 부디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길 바라면서 밤을 새워 스크롤을 내렸다. 무언가에 이렇게까지 집중해 본 게 오랜만이라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갈증이 해소된 듯한 개운한 기분도 함께였다. 그날 나는 피곤한 상태로도 생글생글 웃으며 즐겁게 하루를 보냈다.


노래만 해도 그렇다. 나는 늘 오래된 발라드나 OST만을 반복 재생하는 편이었는데, 취향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든 뒤로는 외국노래든, 익숙하지 않은 제목의 노래든, 가리지 않고 듣기 시작했다. 요즘은 발매조차 되지 않은 어느 한 유튜버의 자작곡을 마르고 닳도록 듣고 있다.


마음의 방을 가득 채워갈 무렵, 환경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봤자 살던 집의 계약이 만료된 것뿐이었지만. 집주인과의 계약 연장이 불발되고 나서 나는, 달콤한 사탕을 처음 맛본 아이처럼 설레었다.

낡은 가구들은 모조리 버리고 새로 이사 갈 집을 나만의 취향으로 예쁘게 꾸미고 싶었다.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집. 이번 신호대기에선 집을 사랑해 보기로 했다.


여러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작은 소품부터 큰 가구까지 세세한 기준을 세워 골랐다. 리뷰가 많다고 무작정 사거나, 그냥 첫 페이지에 뜨는 상품들을 바로 장바구니로 옮기던 예전의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직접 배치도를 그리고, 줄자로 일일이 간격을 측정했다. 디자인과 가격이 마음에 들면 리뷰가 적어도 당당히 후보에 올렸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도 나는, 또 다른 취향을 발견했다. 가구는 무조건 우드&화이트로. 소품은 실용성보다는 감성 쪽이 나와 잘 맞았다.


사람들이 왜 쇼핑에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머리를 싸매며 비교하려니 힘이 들긴 했지만 즐거웠다. 택배를 기다리고, 배치를 상상하는 과정마저도 힐링처럼 느껴졌다.


원래 살던 곳에서 20분 떨어진 동네로 이사를 온 게 나흘 전이다. 생활 반경은 비슷하지만 크게 3가지가 달라졌다.


첫째는 뷰. 원래는 커다란 산 밖에 안 보였는데 여기는 바로 앞이 주택단지라 그런지 앞이 뻥 뚫려 있고, 도로가 보인다. 차의 헤드라이트와 가로등이 적절히 어우러진 야경이 훨씬 볼만하다. 불을 다 끄고 누우면 일렁이는 도심의 불빛이 방 안을 분위기 있게 비춘다.


둘째는 자주 가던 시립 도서관까지의 거리가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걷는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평지라 손에 짐이 아무리 많아도 걱정이 없다.


마지막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나의 시선이다. 취향을 찾아가면서,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됐다. 마음의 소리를 듣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전보다 훨씬 괜찮은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호 하나 건너려고 길바닥에서 숱하게 멈춰 서겠지만 그럴 때마다 취향으로 가득 채운 나의 방을 떠올리려 한다.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은 덜 지루할 수 있게. 그리고 더는 머릿속에서 두서없는 불안이 재생되지 않도록.


나는 나의 방에서 오래도록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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