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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송목 Oct 20. 2021

날아가는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실패 통찰의 희망전략 (NO.11)

 

살아 움직이는 자는 누구나 한 때의 영광과 하나쯤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있다. 바로 우월감에 의한 과거의 영광과 열등감에 의한 트라우마다. 예컨대 수능성적, 일류대 출신, 수석졸업, 돈, 땅, 재산 등 오만가지 과거 화려함에 근거한 소위 ‘라떼’의 추억들이다. 반대로 가난, 학벌, 신체 외모 등에 기반한 상처들이다. 이런 우월감과 상처의 추억들은 시간이 흐르다 보면 『1984』의 조지 오웰의 말처럼 기억이 조작된다. 나아가 기억은 확장되고 선명해지기도 한다.


태국에 가면 코끼리 쇼를 볼 수 있다. 이때 코끼리는 조련사의 조그마한 손짓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말을 잘 따른다. 시키는 대로 한다. 왜 그럴까? 소통이 잘되어서? 동물과 친화력이 좋아서? 아니다. 어릴 때 불훅((bullhook)이나 채찍질을 많이 당해서다. 큰 덩치의 코끼리가 의지만 있다면 금방이라도 뽑힐 것 같은 작은 말뚝을 전혀 거스르거나 뽑을 시도조차 않는다. 시도하는 즉시 고통이라는 어릴 적 기억 때문일 것이다. 어린 새끼 시절 묶여있던 작은 말뚝의 힘을 10배나 더 크고 힘이 세진 지금도 강하게 기억하고 거기에 묶여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착각과 트라우마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쟤가 학교 다닐 때  나보다 훨씬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큰 회사 사장이야" 과거를 기반으로 한 부러움 반 질투반이다. 초등학교나 중고시절의 성적이 평생의 성적으로 각인되어 머리가 희끗해진 지금도 그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런 현상은 공부 성적 외에도 얼굴, 키, 집안 형편, 고급 신발, 옷차림 등 정말 별거 아닌 것들에도 무수한 기억과 꼬리표가 있어 집요하게 따라다닌다. 사실 그 성적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달달 외우고 계산하고 ‘4지선다’ 선택지에서 하나의 답을 고르는 기능일 뿐이다. 그래서 학교 성적이 높다는 것은 생각이나 지적능력이 뛰어나 창조력을 발휘한다거나 도전정신이 아니라 단순기능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 20년, 30년 지나서도 그때 그 성적으로 우쭐대는 사람이나, 30년 전 그 성적에 매여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나 양쪽 다 매 한 가지다. 동창회 같은데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가관인 것은 다들 그때 녹화된 동영상을 다시 틀어 놓은 것처럼, 그때 그 서열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출발 5km 지점의 1등 주자라 해서 42.195km의 미래 골인지점 1등이 담보될 수 없다. 출발 5km 지점은 전체 구간 중 극히 일부 구간에 불과할 뿐이다. 심지어 30km도 단언할 수 없다. 마라톤 페이스 메이커는 30km까지도 함께 뛰다 빠지니 말이다.

정보력의 차이에 의한 열등과 우월의식도 있다. “참새가 어찌 봉황의 뜻을 알겠느냐”(연작 안지 홍곡지지, 燕雀安知鴻鵠之志)라는 말은 평범한 사람들은 위대한 인물의 큰 뜻을 알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정보가 한정되고 폐쇄된 과거에 지식인들이나 권력자들이 양자 간 신분의 차이를 선천적인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여 그들의 지식과 지혜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도전을 원천 차단하려 했다. 힘과 지식의 세습을 장기적으로 도모하기 위한 일종의 최면술이다. 한때 일반인은 아무나 성경이나 책을 읽지 못하게 했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사실 그 시절 정보력 차이는 정보 공급의 불평등 불균형에서 비롯되었다.

아직도 여전히 일부 봉황들은 과거 전통적 지위의 우월감에 빠져 참새들을 무지렁이로 생각하는 이가 있다. 또 많은 참새들도 그들 지위에 짓눌려 어깨를 펴지 못하고 봉황의 지배구조 속에 갇혀있다. 아니면 시늉을 하고 있거나 보호의 안락에 도취해 있다.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다. 이제 참새나 봉황이나 둘 다 정보의 유통 조건이 비슷해졌다. 윗사람이 더 똑똑하고 나이 든 사람이 더 지혜로울 거라는 환상과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와도 될 때가 되었다. 참새의 그 작고 날렵한 날개 짓만으로도 기민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다.

현재를 지배하는 사람이 과거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과거를 버리고 현재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뒤돌아 보면서 추억을 회상하기보다는 앞날의 내일을 설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게 희망설계의 첫 단추다. 날아가는 새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공중에 떠 있는 한 계속 날갯짓을 해야 한다. 지구가 떠있으니 우리도 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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