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아침.
어김없이 카페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어제와는 다르게, 내 머릿속은 복잡했다.
‘왜 이렇게 그 사람이 신경 쓰이지.’
그녀의 미소, 따뜻했던 손, 익숙했던 눈빛.
“하…”
커피를 내리다가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사장님!”
익숙한 목소리가 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오늘도, 아무렇지 않게 내 일상 속으로 걸어오는 사람.
“오늘 점심시간 비워요.”
“오늘은 또 뭐예요?”
“밥 먹어요.”
“… 어제도 먹었잖아요.”
“그래서요? 오늘은 오늘이에요.”
유하는 내 맞은편에 앉으며 내 커피잔을 당겨갔다.
“이거 제 거 맞죠?”
“아니요. 내 커피인데.”
“이제 제 커피예요.”
내가 항의하려는 순간, 유하가 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장난스럽게 눈을 맞췄다.
“사장님, 오늘은 저랑 뭐 하고 싶어요?”
“…글쎄요. 그런 생각 안 해봤는데.”
“그럼 지금부터 해봐요.”
“…”
“저랑 하루 종일 있고 싶다, 그런 거 생각해 봐요.”
**
결국, 나는 또 유하를 따라나섰다.
점심을 먹고, 유하가 이끄는 대로 택시에 탔다.
“이거, 어디 가는 건데요?”
“비밀이에요.”
“또 몰래 계획했죠?”
“당연하죠. 사장님이랑 있으려면, 매일매일 새로운 이벤트가 필요하거든요.”
“… 참 그런 거 잘하네요 “
유하는 웃으며 내 팔짱을 끼었다.
**
도착한 곳은 한적한 골목, 낡은 건물의 꼭대기층.
문을 열자, 작은 프라이빗 영화관이 나왔다.
“여기, 제가 대관했어요.”
“영화관을요?”
“네, 심야에만 여는 프라이빗 극장이에요.
원래 이 시간엔 아무도 안 받아주는데, 제가 부탁했어요.”
“배우라서 가능한 거예요?”
“아니요. 돈을 두배로 줬거든요! 제가 이래 봬도
돈 많은 여자예요ㅎㅎ.”
유하가 내 손을 끌어당기며 안으로 들어갔다.
스크린에는 유하가 출연했던 로맨스 영화가 틀어졌다.
“이거, 네가 나온 영화잖아요.”
“네, 제가 첫 주연 맡았던 영화예요.”
유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거 알아요?
사장님, 같이 지낸 시간이 길어도
그냥 스치는 인연이 있고,
짧아도 아주 깊은 인연이 있을 수 있어요.”
“…”
“사장님한테 난, 지금은 짧은 인연이겠죠.
몇 번 본 사이니까.”
유하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근데 사장님이 아니 리안 네가
내 인생에 남긴 시간은, 꽤 길어요.”
“…”
“그러면, 우리 운명인 거 맞죠?”
리안은 조용히 물었다.
“… 운명?”
“저는 그렇게 믿기로 했어요.
그래야, 매일매일 사장님을 다시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서.”
내 가슴이, 조용히, 하지만 깊게 흔들렸다.
“이봐요, 이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저 함부로 안 해요. 전 늘 진심이에요.”
유하는 내 어깨에 머리를 살짝 기대었다.
“사장님이 기억을 잃어도, 전 매일 다시 사랑받을 거예요.”
“…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요.”
“사장님이니까요.
사장님을 좋아하는 내가, 내일 사라져도 오늘은 남고 싶어요.”
영화 속 유하가 웃었다.
곁에 있는 유하도, 내게 웃었다.
**
해가 지고, 유하를 데려다주는 길.
“사장님, 오늘 즐거웠어요?”
“응. 솔직히, 좀.”
“내일도 같이 있어요.”
“… 너, 왜 이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요?”
“사장님은 저를 좋아하니까요.”
“…”
“그거, 제가 알고 있어요.”
유하는 내게 손을 흔들며 걸어갔다.
가로등 아래, 작아지는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다.
‘좋아한다니… 아니, 아직은 아닐 텐데.’
그런데 왜, 내 마음이 점점 무너지고 있는 것 같지.
**
그날 밤.
루아가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설레지?
너, 사랑에 빠지는 건 정말 빠르다니까.”
“… 이거, 원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글쎄, 이번엔 조금 더 빠른 것 같아서 말이야.
너… 혹시 이번 주 안에 저주 풀릴지도?”
“…그런 건 아직 생각 안 해봤어요.”
“사랑하는 건 본능이고, 기억은 선택이야.”
“내가… 선택하고 있는 건가요?”
루아는 내 어깨를 두드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선택.
이미 네가 하고 있는 걸지도 몰라.”
“이번 주, 재밌겠는데?”
루아는 그렇게 웃으며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사랑했던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는 기억을 버렸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건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고,
그 사람을 구하기 위해 대가를 치렀다는 사실뿐.
하지만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왜였지? 왜 그녀를 그렇게 지키고 싶었지?
그녀는 누구였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일까.
아니면,
다른 누구였던 걸까.
루아는 어디선가 내 생각을 읽은 듯,
다시 내 곁에 나타나 미소 지었다.
“넌 항상 이 부분에서 고민하더라.
‘사랑했던 사람을 잊었지만, 누군가는 내 기억 속에 있었다’는 걸.”
“…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넌 그녀를 몰라.
너는 그녀가 누구였는지 잊었어.
하지만 ‘그녀를 위해 내 기억을 버렸다는 사실’만은
절대 지워지지 않았어.”
“…….”
“네가 원했잖아.
살려달라고.
내가 말했지? 대가로,
‘그녀’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거라고.”
루아는 내 이마를 톡 치며 웃었다.
“넌 계속 궁금해할 거야.
‘그녀는 누구였을까.’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 정말 그 사람일까.’”
“…….”
“그리고 네가 매주 사랑하게 되는 이 사람,
그녀는 말이야… 처음부터 네 사랑이었어.”
루아는 그 말만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누구였을까, 그 사람은.’
‘혹시… 너였을까.’
**
바람이 불었다.
내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이 감각.
하지만
너를 바라볼 때,
내 가슴은 이렇게 요동친다.
‘내가 너를 잊어도,
너는 매일 내게 다가오는구나.’
이 이상한 인연 속에서,
나는 어쩌면,
다시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