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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 《무정형의 삶》

by 미리



10월의 어느 , 열 시간 넘는 비행 끝에 도착한 곳은 동유럽 그리고 '가을'이었다. 첫 유럽에 그토록 쉽게 녹아들었던 건 다름 아닌 가을 풍경 덕분이었다. 로망 속의 여행지 유럽도 자연 앞에서는 우리가 머무는 곳과 같은 세상이었다.


유럽이 낯설지만은 않았던 이유이자 왠지 모를 '안도감'이었다. 가을은 그렇게 유럽을 충분히 예뻐하고 아름다워해도 될 자유를 선사했다.



가을을 두고 사람들은 '독서하기 좋은 계절'이라 칭한다. 가을의 고고한 하늘과 풍성한 자태, 살랑이는 기분 좋은 바람, 고독 그리고 낭만.




이번 유럽행에 책 3권을 챙겨갔다. 세 권 중 두 권은 꺼내보지 못했고, 그중 한 권을 무사히 완독 했다. 김민철 작가님의 《무정형의 삶》, 표지부터 내용까지 모든 것이 낭만을 가리켰다. 여행 중 그것도 유럽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여행하는 자의 행운'이자, 독자로서의 기쁨이었다.




《무정형의 삶》은 한 여자가 20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꼭 가야만 했던, '파리'에서 보낸 두 달간의 이야기다. 작가님이 오래 다닌 회사를 그만둔 결단의 이유는 한 문장으로 설명하긴 어렵지만, '살던 대로 살아서는 다른 답을 찾을 수 없다'는 건 명확했다. 다른 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른 삶이 필요했고, 다른 삶을 살고 싶다는 사람을 말릴 수 있는 방도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퇴사 후 계획은 오래된 꿈이 있는 곳으로 떠나는 것, 그리고 다른 모양으로 삶을 살아보는 것.


파리만 다녀오면 근사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다. 한평생 몰랐던 자아를 거기서 갑자기 찾을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 알면서도 떠나야만 하는 때가 있다. 공간의 형상을 한 시간이, 그곳에 혼자 아무 말 없이 있는 인생의 한 조각이 필요한 것이다.


작가님은 20대 초반 파리에 대한 작은 불꽃 하나를 품었다. 불꽃이 꺼지지 않도록 애지중지 보살피며, 힘들 때마다 그 작은 불꽃에 기대며 버텼다. 꿈을 고이 접어두고, 출근하고 퇴근하는 매일의 일상을 살았다. 기어이 불꽃을 꺼트리지 않았고, 그 작은 불꽃을 등대 삼아 마침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년 넘게 간직한 꿈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60일이라는 시간이 펼쳐졌다. 파리에서 하고 싶은 일은 각종 치즈와 허브 사기, 같은 미술관 여러 번 가기, 단골집 만들기··· '산다'라는 동사가 허락하는 세상에서 소박하게 이룰 수 있는 것들. 새벽 공원 산책, 아침 바게트, 노천카페, 익숙해진 동네, 그리고 좋은 날, 좋은 시간, 좋은 나.



내 행복은 자주 미술관에 있었고, 보고 싶은 그림 앞에서 얼마든지 시간을 써도 된다. 나의 가난한 지식, 부유한 시간으로 메꿔주겠어.

살고 감동하고 사랑하고 있다. 이곳이 나의 매일이라는 것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만들어낸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이제 그 누구도 부럽지 않다. 결핍을 다름 아닌 지금의 내가 다 채워주었다. 오래도록 내가 부러워할 대상은, 오늘의 내가 될 것이다.



작가님의 혼자 하는 여행에는 가끔 '허무'가 찾아왔지만 그건 '텅 빈 상상력의 자리'라는 걸 깨달았고, 파리로 날아온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는 '친구의 행복'을 배웠다. 그리고 '나는 어떤 모양이 되고 싶은지'를 고민했다. 회사원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었던 시간은 이제 끝이 났다. 지금부터 나는 나를 어떤 모양으로 빚을 것인가?



작가님은 마음의 결만 보살피며 하루하루의 모양을 결정했다. 답을 못 찾는 걸 조급해하지 말고, 성급한 답을 내리지도 말고, 내 방식대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파리에서 보낸 시간은 휴가가 아닌 살고 싶은 속도대로 살아도 되는 여행, 여행이 아니라 한 시기의 삶, 그리고 무정형의 시간이었다. 대단한 무엇이 변하는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모양으로 나다웠던 여행, 앞으로도 나다울 삶. 작가님이 여행 중 얻은 가장 큰 수확이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유럽에서, 행복한 여정 중 인생책을 만났다. 꼭 정해진 대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다양한 모양의 나를 만나 보라고 용기를 준 《무정형의 삶》. 여태 읽어 본 에세이 책 중에서 가장 좋았고, 나와 결이 맞는 문장들이 많았다. 이렇게도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구나,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아껴가며 읽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또 다른 세계를 홀로 여행할 수 있도록 해준 우주 같은 책이었다.



여행을 다녀온 뒤 다시 책을 처음부터 읽어보았다. 왜 이 책이 그렇게나 좋았는 지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지금 이유를 알 것 같다. 작가님의 고민과 생각이, 살아가는 방식이 나의 삶과 결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작가님은 모범생 같은 삶을 살아왔다. 모범적인 나와 헤어지고자 떠났지만 그곳에서도 결국 모범적인 여행을 한 듯 보였다. 공원에 피크닉을 갈 때도 책과 노트를 챙겨가셨다. 현재에 집중하려고 성실하게 애쓰고, 감각적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셨다.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거기까지 가서도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시간이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 주므로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참 공감 가는 내용이다. 유럽 여행을 하면서도 책을 읽고, 스쳐 지나가려는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려고 했던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돌아와서 글을 쓰고 있다.




퇴사에 관한 고찰도 공감됐다. 작가님이 퇴사를 통보했을 때 누군가 이렇게 물었었다. "도대체 돈을 얼마를 벌어났길래 회사를 그만뒤요?" 이에 대한 작가님의 진심은 이랬다. '돈이 아니라 시간을 소유하고 싶다. 24시간을 오롯이 내 마음대로 살며, 내가 어떤 모양으로 빚어지는지 보고 싶다. 그게 너무 궁금해서 그만둘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대책 없이 퇴사하고 싶지 않은 책임감 때문에 버티고 있다. 언젠가는 결단을 내릴 것이고, 그 미래가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김민철 작가님은 책에서 이렇게 조언해 주셨다. '자주 불안할 것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 맞나 의심할 것이다. 내가 되고 싶은 모양이 겨우 이거였나 고민할 것이다. 그렇지만, 막막한 만큼 자유로울 것이다. 고독한 만큼 깊어질 것이다. 불안한 만큼 높이 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길잡이로 삼고, 삶을 그려나가면 될 것 같다는 용기를 얻었다.



작가님은 여행이 끝난 뒤 한 가지는 명확하게 알 것 같다고 하신 게 있다. '나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미래에 나를 데리고 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어이 그 꿈에 착륙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행복이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갈 줄 아는 사람. 나 또한 그렇게 되어가고 있고 되고 싶기에, 작가님의 삶에 그리고 이 책에 토록 마음이 오래 머문 게 아닐까.




여행을 하면서 행복을 배가시켜 주는 책 한 권을 만났다. 누군가에게 선뜻 권할 수 있는 인생책을 좋은 타이밍에 마주했다. 여행 산문집인 줄 알고 가볍게 읽었지만, 인생을 배웠다. 예쁜 문장들을 볼 때마다 줄 치는 만큼 '읽는 기쁨'을 느꼈다.


여행 중 틈새 독서는 나를 탐색할 수 있는 온전한 시간과 자유를 선사해 주었다. 내가 마련한 유럽 여행의 여정이 이제 진짜 끝을 향해가지만, 그럼에도 책 덕분에 마음이 헛헛하지 많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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