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적멸 6. 자네가 간절히 찾는 그 무엇이 꿈이고 운명인 것이야.
승문은 첫날밤 일찍 잠들어 다음날 새벽에 일어났다.
새벽 3시의 산속 공기는 맑았다. 풍부한 산소와 수풀의 훈향이 밀려왔다. 도시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청량감과 힘이 솟구쳤다. 승문은 동굴 밖으로 나갔다.
밖의 풍경은 어둠 속에 희미한 안개가 드리워진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정상을 향한 산길 양편의 새벽이슬이 옷깃을 적셨다. 또 다른 세계에 온 느낌이 들었다. 자신의 발걸음소리 이외엔 그 어떤 인적도 없었다. 격리된 느낌보다는 완전한 자기만의 세상이 느껴졌다.
날이 조금씩 밝아오자 온갖 새들이 노래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새소리가 들였다. 또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새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들의 소리는 산속의 작은 오케스트라같았다.
소쩍새는 ‘소쩍소쩍’ 휘파람새는 ‘휘이익 휘이익’ 하며 제 이름을 불렀다.
멧세는 찌르륵 찌르륵하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밖에 바람소리, 솔가지 흔들리는 소리들이 귓가를 울렸다.
승문은 또 다른 세계의 음악과 맑은 공기, 풍광에 취했다.
산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아찔했다.
멀리 산자락이 휘뿌연 안개의 화폭에 감겨 있었다. 마치 신선이 구름 위에 노니는 것 같았다. 산의 기운이 전해주는 쩌렁쩌렁한 기울임도 느껴지는 듯했다.
승문은 서서히 모든 속세의 끈들이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어디선가 들리는 인기척이었다. 수풀사이를 휘적거리며 걷는 걸음걸이 소리 같았다.
승문은 귀를 기울였다. 이 첩첩산중에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인기척의 소리였다. 승문은 절벽 가까이 평평한 바위에 앉아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그때 갑작스럽게 굵고 저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야 여기에 왔느냐!!”
40대 초반쯤 보이는 남자가 홀연히 나타나서 말했다.
초면의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서 하대를 하는 것에 놀랐다. 승문은 멍하니 그를 보았다.
그는 말끔한 차림의 남자였다. 유달리 눈빛이 맑고 깊었으며 얼굴빛이 환했다.
승문은 혹시 또 다른 사람이 있는가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저 보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럼 이 첩첩산중에 자네밖에 더 있겠나.”
승문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어젯밤에 청룡동굴에 왔습니다. 그곳에서 수행을 하고자 왔습니다.”
그는 느닷없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네가 드디어 왔구나.”
승문은 왜 그가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를 아시는지요?”
“자네를 잘 알고 있지? 내가 우주의 천문을 살펴가며 33년을 기다렸지. 수없이 이 산으로 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터인데, 왜 이제야 왔는가? 자네가 간절히 찾는 그 무엇이 꿈이고 운명인 것이야.”
점입가경이었다. 그의 말은 이해했지만 무슨 의미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승문은 그를 다시 보았다. 그는 할아버지가 귀여운 손자를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