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직이다. 굳이 하는 일이 뭐냐고 말하라면 전업 주부다. 하지만 전업주부가 따로 보수를 받는 일은 없으니, 일을 하고 그 대가로 보수를 받는 것을 직업이라 정의한다면 나는 직업이 없다.
나는 은퇴자다. 거의 40년을 같은 직종에 종사했고, 나이가 차서 퇴직을 했다. 평생 하던 일을 그만두었을 때 나는 넘쳐나는 시간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우울증에 걸릴까 봐 지레 겁을 먹었다. 그래서 1년 정도 계약직으로 내가 몸담았던 직장의 끄트머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 직장의 소속이 아니었다. 같은 구성원인데도 나만 따로 겉도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나마도 1년 후 그만두어 버리고 완벽한 은퇴자가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도 일찍 출근할 일이 없으니 늦게 일어났다. 아침을 먹고 돌아서니 점심때가 되었다. 하루 해가 짧아져 버렸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오전 시간을 어떻게 쓸까 하다가 집 가까이 있는 둘레길 산책을 했다. 집에서 나와 아파트와 연결된 등산로를 올라가면 관악산 둘레길과 만나는데, 서울대까지 가지 않고 중간 길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이런 생활을 벌써 6년째 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약을 받으러 다니는 병원에 피검사 때문에 갔다. 대학병원이라 많은 사람들이 피검사를 위해 채혈실을 찾는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면 안내 담당 직원이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순서표를 준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한쪽 창구에서 신규로 보이는 간호사가 쉽게 채혈을 못하고 쩔쩔 매고 있다. 채혈 대상자는 이미 주사 바늘로 여러 번 찔린 듯, 표정이 좋지 않다. 대기자가 몇 명 없는데, 순서가 가까워지자 은근히 걱정이 된다. 그 간호사한테 걸릴까 봐 걱정하고 있는데 다행히 다른 창구에서 부른다. 휴, 다행이다.
순서표를 내고 소매를 걷어 올린 팔을 내밀었다. 따끔하면서 순식간에 주사 바늘이 들어가고, 필요한 양의 채혈이 마무리된다. 보통 솜씨가 아니다. 저 자리에서 몇 년이나 저런 일을 했을까. 매일 3시간씩 10년을 연습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하는 1만 시간의 법칙이 있다고 하더니 , 그 정도는 연습하였을까. 쩔쩔매던 신규 간호사도 경력이 쌓이면 채혈의 달인이 되리라.
그런데 하는 일이 너무나 똑같은 일의 반복이라 지루하지는 않을까 궁금해진다. 대상자가 호출되어 의자에 앉으면 이름 확인하고 채혈하고, 실린더를 만들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외화를 보는데 이런 장면이 나왔다. 액션물이었는데, 위험한 상황에서 대테러 특공대 덕분에 구출된 주인공이 여자 특공대원에게 이런 일을 하면 힘들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It's my job."
내가 생활하는데 필요한 돈을 버는 직업이니까 많이 힘들지 않다는, 감당이 되니까 작업으로 삼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때 그 여자 특공대원이 얼마나 멋지게 보였는지 모른다.
지루해 보이는 반복적인 일을, 스트레스가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표정으로 채혈하고 있는 그 간호사도 아마도 그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생활에 필요한 돈을 벌 수 있어서 좋고, 이 일 또한 내가 감당할 수 있으니까 내가 직업을 삼은' 거라고.
70년대만 해도 직업 선택의 폭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다. 내가 살던 지방 도시에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이 2군데 있었는데, 하나는 교대, 하나는 사대였다. 외지로 나가지 않는 한 내게 주어진 선택은 어쨌든 교사였던 셈이다. 집안 형편이 나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부산에 있는 여러 대학을 선택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가 교사였던 우리 집 형편과 분위기는 나를 다른 직업을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이 아닌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을 하고, 고향에서 살아온 세월보다 더 오래 서울 생활을 하였지만, 직업은 교사였다. 원해서 택한 직업은 아니지만 적성에 맞았고, 생계를 위한 수단이기는 했지만 지루해할 틈 없이 즐겁고 재미있게 지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행운아다.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가질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택하여 생계까지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취준생이라는 이름으로 오늘도 직업 선택의 길에서 애를 쓰고 있다. 더러는 취포생(취직 포기생)이란 말도 생기는 걸 보니 직업을 갖는 일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70년대 이야기를 하면 '라떼는' 세대이겠다. 그때만 해도 대학만 제대로 들어가면, 졸업 후에 취직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소위 SKY 출신들은 기업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대학으로 연줄(선배를 통한)을 넣기도 했다는 말도 있었다. 대학 졸업생이 귀했을 때의 이야기다. 고졸도 취직이 어렵지 않았다.
눈높이가 높아져서일 수도 있다. 인구수는 주는데, 취직을 못해 고민하는 젊은이의 수는 자꾸 늘어만 갈까. 어쨌든 양질의 일자리가 많아져서 그들이 원하는,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무직이다. 이 나이에 누가 보수를 줘 가면서 일을 시킬 직장이 있겠는가. 내 능력으로 돈을 벌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을 하던 시절은 지났다. 아직은 움직일 만 하지만, 언제 다리의 힘이 빠져 움직이기 어려워질지 알 수 없다. 사회에서 호칭은 어르신이다. 전철도 무임승차 자격이 생겼다.
지금은 손녀 돌보미 중이다. 학교에 데려다주고, 학교와 학원 수업이 끝나면 집에서 복습하는 것을 도와준다. 보수는 없으니 직업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나마 올 12월이 계약 기간 만료다. 우리가 전원주택으로 이사할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다. 블로그와 브런치를 하게 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파워 블로거나 유튜버로 돈을 생계수단으로 할 만큼 버는 사람은 직업일 수도 있겠으나, 수익률이 zero이니 이 또한 직업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 틈만 나면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보수가 없으면 어떤가. 나는 무직이지만 내가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행복하다. 나는 내 은퇴 인생에 새로 고침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