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한글 수업을 하시는 최고령 선생님 H는 올해로 78세시다.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은 유일한 선생님이다. 선생님 H는 2012년에 학생으로 우리 야학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그녀는 자습의 한계를 느끼고, 우리 야학에 입학했다. 그리고 연달아 중등 시험과 고등시험을 합격한다. 그렇게 2년 만에 학교를 졸업하시고, 곧장 방송통신대학교에 진학하신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학교에 진학하신 것만으로도 대단하신데, 졸업 후 우리 야학에 선생님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5년 넘게 수업을 하고 계신다.
선생님 H의 존재만으로도 학생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 학생들과 같은 고민을 했던 사람이 공부를 마치고 선생님까지 하고 있다니. 그것도 적지 않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서 말이다. 그녀의 상징성은 사회에서 날고 기는 다른 선생님들은 대체할 수 없다. 이렇게 자신만의 영역을 수년간 만들어낸 교사다. 가끔 학생들이 '나는 나이가 있으니까, 속도를 못 따라가요.'라고 힘들어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H를 방패로 활용한다.
"어머님, 선생님 H가 우리 야학 졸업했을 때 나이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 어머님보다 더 나이가 많으셨죠? 그런데도 대학교까지 다니셨잖아요. 할 수 있어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학생들이 더 이상 변명을 할 수가 없다.
"학생분, 초등학교를 50 년 전에 졸업했어요? 그 뒤로는 공부가 처음이죠? 그럼 초등반부터 다시 듣는 게 좋을 거 같네요. 내가 공부해 보니깐 우리 때랑 공부 난이도가 너무 차이나. 내 생각에 당신은 곧장 중등반부터 시작하면 힘들 거예요 아마."
이런 조언은 오직 선생님 H만 가능하다. 사실 공부 내용을 알려주는 건 다른 선생님들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늦깎이 학생으로서 겪었던 고충을 나누는 건 오직 선생님 H만의 역할이다. 오직 그녀만이 지식이 아닌 지혜를 나눠줄 수 있다.
선생님 H의 역할은 상징성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수업은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 카카오톡 대화할 때 주로 틀리는 맞춤법 위주로 수업을 하신다. 받아쓰기 시험도 자주 보는데 가끔 나도 흠칫할 때가 있다. '아, 이거 제대로 된 맞춤법이 뭐였더라' 헷갈린다. 선생님 H의 진가는 교과서 밖에서 나타난다. 공부를 이어나가는 마음가짐, 영어를 공부할 때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등 본인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나눈다. 우리는 무작정 알파벳을 어떻게 읽는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을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반면에 선생님 H는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영어를 접근한다.
"이게 우리가 영어를 못할 수밖에 없어. 평생 한국말만 썼는데 전혀 다른 나라말을 배우는 게 어려워요. 내가 공부를 먼저 해보니깐, 한국말이랑 영어를 연결해서 생각하면 안 돼. 한국말은 없다~ 생각하고 아기가 돼서 새로운 말을 배운다고 마음을 먹어봐요. 그리고 살림할 때 라디오 같은 걸로 영어를 계속 틀어놔. 집안일하면서 시나브로 듣는 게 도움이 많이 돼요."
검정고시 지원센터에서 공문이 왔다. 연간 발행하는 우수사례 자료집에 실을만한 학습자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왠지 우리 야학이 선정될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선생님 H라는 우수 학습자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봐도 이런 야학 선생님은 귀할 것이다. 우수사례 사례집이라면 우리 H 께서 응당 등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H 선생님, 우수 학습자 사례로 선생님을 추천드려도 될까요? 선정되면 인터뷰를 하셔야 해요."
"영 부담스러운데, 꼭 해야 할까요? 그래도 내가 이걸 하면 홍보에 도움이 될까요?"
"사실 많은 사람이 보는 매거진이 아니라 마케팅에 크게 도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래도 개인적인 기념이 되지 않을까요? 사진도 예쁘게 찍어준다고요. 하하하"
"그런가요? 그럼 한번 해볼게요. 호호"
내가 초등반 사회과목을 처음 맡았을 때, 제일 먼저 궁금했던 건 '왜 사회과목을 배울까?'였다. 다른 과목은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명료한 이유가 생각났다. 당연히 의사소통을 위해 국어를 배우고, 수학적 사고와 논리력을 키우려면 수학을 배운다. 영어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사회는 왜 배울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유를 네이버에 검색해 봤더니 그 이유가 초등학교 교육과정에 적혀있었다. 우리는 "사회 속 주인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과목을 공부한다. 그것도 문화, 법, 정치, 경제, 역사, 지리 두루 통틀어서 열심히도 공부한다.
주인공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걸까. 주목받는 사람이 되는 것?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것? 명확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주인공은 한 명, 그 외 사람들은 모두 조연이 아닌가. 나를 포함해서.
선생님 H의 추천서를 쓰면서 '이 분은 주인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우리 야학에서 '가장 학생들에게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면에서 그녀는 주인공이다. 그녀보다 수업을 잘하는 선생님, 인기 있는 선생님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대체불가능한 선생님 H의 영역이 있다. 그녀는 그녀만의 연극에서 주인공으로 출연 중이다.
야학 밖에서 선생님 H를 보면 평범한 그저 할머니 중 한 명이다. 우리가 길에서 스치는 수백, 수천 명 중 하나. 너무 평범해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조연, 아니 엑스트라 중 한 명. 하지만 야학에서 그녀는 주인공이다. 우리도 자신만의 공연이 있다. 오늘 하루동안 스쳐간 많은 사람들이, 어딘가에서는 자신만의 밭을 일구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세상의 모든 평범한 주인공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선생님 H의 인터뷰가 궁금하시다면?
“야학서 칠순에 대학 가고, 후배 가르치러 돌아왔어요” :: 문화일보 munhwa
사진 출처 : 문화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