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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20. 2024

그건 기억해야지

 지민 씨는 허허실실의 명수였다.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곤 했다. 흘러가는 대로 사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누구보다 열심을 부렸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3년 전. 나는 혼자 야학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지민 씨는 나를 처음 봤음에도 고무장갑을 찾아와서는 '여기 청소하면 돼요?'라고 물었다. 인사도 나누지 않은 둘은 묵묵히 어색한 화장실 청소를 했다. 지민 씨는 늘 그랬다. 별 일 아닌 듯.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다 괜찮다는 냥 굴었다. 가끔 선생님이 늦으면 '선생님, 늦게 오면 우리는 좋아~ 우리도 좀 쉬어야 되니깐 가끔 깜짝 결석도 부탁해요.'라며 도리어 미안해하는 선생님들 안심시켰다. 선생님이 어려운 질문을 받고 난감해할 때면 '얘들아 모르면 그냥 외워~ 선생님 곤란하게 만들지 말고'라고 되려 목소리를 높여주신다. 행여나 교사들이 민망해할까 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관대함은 본인에게도 적용된다. 수업 내용이 조금 어려워지면 '아이고 어렵다... 나는 하나도 모르겠어~'라며 너스레를 피웠다. 타인에게 너그러운 만큼, 본인에게도 넉넉한 잣대를 가진 그녀다. 졸기는 또 얼마나 조는지. 저녁 9시가 넘어가면 눈이 감기는 게, 인간 시계다. 꾸벅꾸벅 조는 정도를 넘어서 머리가 해드뱅잉을 하고 있다. 급우들이 면박을 주고, 선생님들이 매번 깨워줘도 잠을 이겨내지 못하니 이제는 다들 포기했다. 그저 그녀가 졸기 시작하면 '벌서 아홉 시가 됐구나!'라고 넘어간다.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건 5분이라도 수업을 빨리 마쳐 드리는 것일 뿐.


 그런데 시험을 치면 곧잘 점수가 나온다. 재능러이거나, 앞에서는 내숭 피우고 뒤에서 공부하는 학생으로 여겼다. 나와 함께 지냈던 초등반도 한 에 승격하시고, 연이어 중등 검정고시도 단번에 합격하셨다.


 2년 뒤, 고등반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나 :  "학생분들 안녕하세요. 앞으로 고등반에서 저랑 국어를 배울 거예요. 지민 씨 은영 씨는 재작년에 저를 만나셨는데요. 초등반에서 저와 사회 공부를 했었죠?"

지민 : "그랬나? 나는 기억이 안 나네"


 지민 씨가 날 기억을 못 했다. 워낙 선생님이 많으니 헷갈렸나 싶었는데, 그녀의 단짝 은영 씨가 지민 씨를 나무란다.


은영 : "어머. 그게 왜 기억이 안나? 김룰루 선생님은 우리 초등반에서 담임선생님이셨잖아. 그건 기억해야지."




 고등반의 높은 수업 난이도만큼, 지민 씨의 허허실실 전략도 강해졌다. 더 많이 졸았고, 더 자주 '도통 모르겠네~' 라며 어려워하셨다. 또 지민 씨가 자주 하던 말씀이 '젊은 선생님들은 죽어라 가르쳐 주는데, 이 할머니가 돌아서면 까묵네.'였다. '나는 고등학교 졸업장 따도 대학교 갈 돈이 없어요. 어차피 저녁에 할 거도 없는데, 이번 시험에 합격 안 해도 돼요. 쉬엄쉬엄 공부하지 뭐. 난 내년에도 학교에 나올 거야~' 같은 너스레도 한층 수준이 높아졌다.


 지민 씨는 우리를 감쪽같이 속였다. 고졸 검정고시에 불합격할 거라더니, 한방에 떡하니 합격해 버렸다. 아슬아슬도 아니고, 교사들을 기만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끈한 점수로 말이다. 선생님들도 깜짝 놀랐다. 솔직히 지민 씨가 합격할 줄은 우리도 예상치 못했다. 의외의 낭보에 모두들 기뻐했다.




 지민 씨는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고 있었다. 알고 보니 지민 씨는 치매 초기 진단을 받았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야학에 다니기로 다짐했다. 공부를 시작하면 그녀의 건강에 도움이 될까 해서. 이 사실을 그녀가 졸업한 뒤에서야 알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의 사연. 설렁설렁 학교에 다녀도 매번 시험에 척척 합격하시는데, 어떻게 상상했겠는가.


 들어보니 약을 복용하면 일상생활에 지장 없게 컨디션이 잘 유지되신다고 한다. 그래서 공부도 해올 수 있었고. 하지만 그 약의 부작용이 바로 졸음. 그제야 지민 씨가 수업시간에 사정없이 졸아댄 이유를 알았다. 설렁설렁 학교 다닌 게 아니라, 약기운과 종일 싸우고 계셨구나. 발목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중이었구나.


 지민 씨와 동급생이었던 은영 씨가 했던 말 '선생님이랑 같이 수업했었잖아. 그건 기억해야지.'라는 말이 예사말이 아니었구나. 그래서 선생님에게 미안해서 반찬을 만들면서도 수학 공식을 외우셨구나. 기억하려고.




 아직도 '그건 기억해야지'가 날 아주지 않는다. 내가 꼭 기억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바쁘다는 이유로 잊고 사는 건 없는지.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기억을 남겨드려야 하는지.

 


지민 씨의 이야기가 실린 기사입니다.

“젊은 선생님이 늙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문 열어줘” (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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