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룰루 Jul 06. 2024

둔재의 땀은 천재의 재능보다 아름답다

※ 야학에서 선생님으로 봉사활동을 하며 느낀 점을 쓴 글입니다.


 수업 중간에 한 번씩 욱할 때가 있다. 학생 간의 학업 성취도 격차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학급이 고등반이라 그 차이가 더 크게 다가온다. 특히 내가 가르치는 국어는 하루아침에 실력이 느는 과목이 아니다. 문해력은 긴 시간 동안 글을 읽고 써야 조금씩 늘어간다. 문해력이 부족한 학생은 본인이 아무리 용을 써서 수업을 들어도 따라가기 버거운 게 사실이다. 1000자 분량의 설명문을 읽으면서 '두 번째 문단 첫째줄이 이 글의 핵심내용이죠?'라고 설명한다고 치자. 다른 학생들은 중요문장의 위치를 금세 찾고 내 말에 귀를 쫑긋하는 반면,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중심 문장을 찾는데만 해도 버거워한다. 내 설명을 들을 여유가 없음은 당연하다.


 "학생 여러분~ 저번시간에 현대시 수업을 했는데요. 복습 한번 해보죠. 시의 화자 무엇이었죠?"

 "화자? 사람 이름 같네 이거 호호호"


 이런 뚱딴지같은 소리까지 하면 그냥 때려치우고 싶어진다. 같이 열심히 달려도 모자랄 판에.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나와 농담 따먹기를 하자는 걸까.




 하늘 씨는 고등반 3년 차 학생이다. 사실 이 분은 예외적으로 고등반에 계신다. 중등 학력 검정고시에 불합격하셨는데, 재수를 하지 않고 고등반으로 올라왔다. 학생이 이렇게 본인의 수준에 안 맞는 반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잘 없다. 같이 공부하던 친한 학생들이 고등반으로 가다 보니, 본인도 함께 월반을 희망해서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결정은 큰 실수였다. 3년이 지나도록 그녀는 중학 검정고시도 합격하지 못하고 있다. 초등학생을 고등학교 교실에 데려다 놓는다고 미적분을 풀어낼 리 없다. 같이 공부한 급우들은 고졸 학력을 얻고 졸업할 때, 그녀는 여전히 중학교 학력을 따지도 못하고 있다. 다른 학생들에게도 피해가 간다. 다른 학생을 제쳐두고 그녀만을 위해 학습 수준을 낮출 수도 없다. 그녀가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는데


  "나는 원래 잘 못해요. 저 언니들은 잘하는데."


 좋은 말도 한두 번이지, 그 말을 듣는 다른 학생들도 나중에는 이골이 났는지


 "아이고 하늘아, 우리도 이거 그냥 배운 거 아니야. 집에서 책 보고 자습해서 겨우 몇 글자 머리에 넣은 거야. 우리도 열심히 하고 있어."


 하늘 씨 입장에서는 '본인은 머리가 나쁘고, 다른 사람들은 머리가 좋으니까 금방 배운다'라고 토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학생들의 노력을 존중하지 않고, 본인에게 '셀프 면죄부'를 부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양측이 피차 불편한 상황이다. 그리고 하늘 씨의 3년 전 결정을 말리지 않은 선생님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래서 앞으로는 예외적인 승급을 제한하기로 선생님들끼리 약속했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복습하는 시간이었다. 하늘 씨의 눈을 봤는데, 내 말을 전혀 이해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짐짓 기억난다는 듯 '아 그렇죠. 맞다 맞다.'라고 눈치보기 추임새를 넣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면서, 속으로는 또 부아가 부글부글한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하늘 씨였던 순간이 떠올랐다. 대학생 때, 남들 3달 공부하는 토익시험을 난 2년을 공부했다. 한번은 785점을 받고 '15점만 더 올리면 800이겠다'라고 좋아했다. 그런데 웬걸, 반년을 더 공부해도 785를 넘지 못하는 거다. 어려서부터 영어에 재능이 없었다. 내 친구는 4달 만에 900점도 받는데, 나는 이게 뭐야. 스스로가 한심했다. 결국 1년이 걸려서 800점을 넘길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목표했던 점수를 따는 데는 2년이 걸렸고. 누군가는 '1년 공부해서 겨우 그거밖에 못했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문하고 싶다. 내가 영어연습을 할 때 넌 무슨 대단한 걸 했냐고. 느리게 가는 사람을 비난할 자격은 당사자 밖에 없다.


 종종 헬스 유튜버들의 영상을 본다. 나는 운동에는 영 재능이 없고, 어쩌다가 헬스장에 가도 머신 몇 개 깔짝거리고 오는 정도다. 헬스를 시작한 지 몇년 되긴 했는데, 하는 둥 마는 둥 하다 보니 몸은 영... 어디 가서 운동한다고 안 하는 게 내 평판에 낫겠다. 그래도 유튜브로 운동 정보는 가끔 챙겨보는데, 어느 헬스 유튜버가 이렇게 말했다.


 "몸 좋은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는 거? 그거는 그냥 놀러 가는 거야. 남들보다 잘하니깐 뿌듯하고 재밌지. 재밌으니깐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거고. 헬스를 잘하는 사람보다 헬스장 가는 게 큰 용기인 사람이 있어. 바로 운동에 재능이 없는 사람. 관절이 선천적으로 약해서 부상을 당하기 쉬운 사람, 마른 사람, 과체중. 이런 사람들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헬스장에 가서 남들보다 쉬운 운동을 기어이 하는 거. 이게 진짜 용기고, 이 사람들이 의지가 큰 사람들이야."


 남들보다 타고난 힘이 없어서 빠르게 몸이 좋아지지 못하고. 헬스가 재미도 없고. 못하니까 재미가 없지. 그래도 기어이 몸을 끌고 헬스장에 가는 것도 나름 대단한 거 아닌가. 내 몸에 변화가 극적이지 않더라도, 운동은 계속하기로 다짐한다.




 하늘 씨도 그렇겠지. 나에게는 근력운동이, 하늘 씨에게는 공부가 그런 게 아닐까. 재능이 없는데, 그래도 포기하긴 싫은 것. 주위 사람들의 시선에 가끔 창피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하고 있음에 뿌듯한 것. 3년 동안 내리 불합격을 하면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도 많다. 연속되는 실패로 의지가 꺾인다. 같이 공부하던 사람은 척하고 붙는데, 나는 그러지 못한다는 것이 부끄러워서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하늘 씨는 적어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하늘 씨는 우등생보다 더 굳은 마음이 있어야 출석할 수 있는 거 아닐까. 반대로 내 생활에도 반성을 했다. '나는 못하니깐'라고 핑계를 대면서 운동을 대강한 게 아닐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큰길을 두고 샛길로만 간 게 아닐까. 트레이너들이 날 본다면 그들도 답답한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하늘 씨가 제일 일찍 출석했다. 수업 시작하기 50분 전인데, 영어 책을 보고 계신다. 과연 내용을 알고 보는 것일까.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꼬불글씨들을 하염없이 쳐다만 보고 있는 것일까. 누구보다 꼬박꼬박 출석하고, 필기도 열심히 하는 하늘 씨. 본인이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지 싶다가도, 늘지 않는 실력이 걱정된다.  여전히 그녀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든다. 그저 '하늘 씨~ 열심히 하셔서 보기 좋아요. 대단하세요!'라고 칭찬을 건넨다. 적어도 훗날 지금을 돌이켜 봤을 때, 의미 있는 시간이라 기억할 수 있었으면 한다.


사진출처 : 문화일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