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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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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Aug 13. 2024

더 이상 세계 여행자가 부럽지 않다

 한 달간의 배낭여행이었다. 스페인, 이탈리아, 체코 3개국을 돌고 한국으로 오는 일정이었다. 회사 입사를 2개월 앞두고 나가는 여행이라 누구보다 홀가분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를 가진 인생 몇 안 되는 시기이지 않은가. 다들 로망으로 삼는 20대 유럽 배낭여행을 나도 할 수 있다니. 그것도 떳떳하게. 이 사실만으로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처음 가보는 유럽은 모든 게 새로웠다. 길에 있는 사람도 다르고,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 무심히 서있는 건물들은 뭐가 이리 멋있는지. 그저 동네를 걷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열흘간 스페인을 여행하고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스페인보다 이탈리아가 더 인기가 많다던데. 과연 얼마나 날 놀라게 해 줄지 기대를 품고 베니스에 당도했다.


 이상했다. 두 번째 여행지인 이탈리아에 오니, 시큰둥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성당을 봐도 감탄이 나오지 않았다. 산 마르코 성당도, 피렌체 두오모도, 바티칸 조차도. 크고 예쁜 건 알겠는데, 감흥이 줄어들었다. 워낙 멋진 장면들을 계속 보다 보니 내 눈이 무뎌져 버린 걸까. 그때는 '아, 이탈리아보다 스페인이 내 취향에 맞는 여행지구나.'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마지막 여행지인 체코에 가니, 또 거기는 좋았다. 스페인, 이탈리아처럼 딱 부러진 랜드마크는 없지만 동화 같은 도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저렴한 물가 덕분에 음식을 마음껏 주문해서 먹을 수 있는 건 덤!




 한동안 이탈리아를 가지 않았다. 배낭여행 당시 이탈리아에서 받았던 감정이 좋지 않아서다. 굳이 그곳에 또 가서 내 마음속에 있는 건조함을 다시 일깨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5년쯤 지난 후였나. 8월 성수기임에도 저렴한 로마 왕복 티켓을 찾았다. 이 가격에 이 시기면 안 갈 수가 없다. 직장인이 맘 편히 장기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기는 몇 없다. 여름휴가 시즌에 이렇게 합리적인 티켓은 일단 예약하고 봐야 한다. 대학생일 때는 한 달 여행도 어렵지 않았으나, 지금은 직장인인 내 몸. 7박 9일짜리 여행도 너무도 길고 감사하다. 짧고 굵은 이탈리아 설욕전을 준비해 본다. 막상 가보니 웬걸, 이탈리아가 너무 좋은 거다. 첫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시큰둥했던 많은 것들이, 이번에는 모두 생생하게 다가왔다. 이탈리아 음식이 이렇게 맛있었나. 왜 첫 여행에서는 본토의 에스프레소를 맛보지 않았지? 젤라토가 왜 이렇게 맛있지?


 장소가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내 문제였다. 스페인은 처음의 설렘이었다. 낯섦이 주는 재미. 경험하는 모든 것이 처음인 아이로 잠깐 돌아가는 기분이다. 체코는 마지막이 주는 간절함이 있었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일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그러기에 더 열심히 눈과 마음에 장면들을 담으려고 욕심을 낸다. 그에 비해 중간은 재미가 없다. 중간에 끼어있던 이탈리아는 지루함이다. 처음이 주는 신선함이 사라졌을 때, 아직 끝이 오기에는 요원한 그즈음. 권태로움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가 나에게 흥미가 없었다. 그러다가 곧 이 여행이 끝난다는 아쉬움이 체코를 즐겁게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느낀 지루함은 내 일상과 가장 비슷한 상태다. 새로운 것 없이 그저 하루하루 견뎌내는 삶. 뭔가 새로운 걸 찾지만, 결국은 귀찮아서 적당히 대강대강 살아내는 내 화요일 같다. 그래서 이탈리아가 재미가 없었다. 같은 이치로 내 일상도 필연적으로 지루할 수밖에 없다. 여행도 길어지면 일상처럼 지루해진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여행도 2주가 넘어가면 지루함을 느낄 정도로 간사한 사람임도 깨달았다.


 그래서 세계 여행자가 부럽지 않다. 그들에게는 여행이 그저 일상인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기대 없이 회사에 가듯, 그들도 여행지로 출근하지 않을까. 그런 삶이 체질에 맞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난 힘들 거 같다. 오히려 내 터전에서 열심히 살다가, 가끔씩 여행을 가야 더 즐겁다. 진짜 승부는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에서 좋은 결과를 만들고 싶다. 그러다가 지칠 때는 여행을 가는 작전이 나에게는 적합하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틈틈이 전 세계를 날다 보면 은퇴할 즈음에는 사실상 세계 여행을 마쳐있지 않으려나? 하는 조심스러운 희망사항을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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