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소르, 이집트
이집트도 아프리카긴 한가보다. 40도를 넘기는 이집트의 더위는 살벌하다. 룩소르는 이집트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임에도 길에 사람이 없다. 이집트 문명 중왕국, 고왕국 시대의 수도였던 이곳 룩소르. 사치로움을 뜻하는 영어단어 Luxury도 이 Luxor 도시에서 나왔다. 수천 년 전 그 옛날에도 신전에서 나일강까지 운하를 파고 배를 띄워서 축제를 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고구려가 생기기도 한참 전이다. 화려했던 이집트인들의 생활상을 눈을 감고 상상해 본다.
다행히 이집트는 건조해서 그늘에만 가도 살만하다. 찜질방처럼 푹푹 찌는 한국 한여름보다는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든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무렵이 되면 룩소르 신전 앞은 관광객들로 가득 찬다. 얼핏 봐도 눈에 띄는 나 같은 동양인에 시선이 집중되곤 한다. 철없는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니하오' 거리는 통에 정신이 피곤해진다. 배는 고픈데 음식은 낯설다. 길거리 음식으로 허기만 달래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랬다가는 지금 나를 쳐다보는 이들의 먹잇감이 될 것 같다. 니하오 소년들, 1달러로 마차를 탈 수 있다는 마부(1달러는 승차료이고, 하차 시 얼마를 요구할지 장담못함),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팁'을 요구하는 남루한 차림의 아이들까지. 내 돈을 탐내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없는 사람 취급하기'다. 그저 옅은 미소를 띠고 무시하면 십중팔구 그냥 지나갈 수 있다. 가끔 질긴 사람들은 나를 졸졸 따라오면서 '원달러' 나 'Where are you from?'으로 대화를 잇고자 한다. 이러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이렇게 마음이 지쳐갈 때쯤, 가장 룩소르 신전이 잘 보이는 곳에 오아시스처럼 서있는 그곳은 바로 맥도날드. 내가 아는 맛이면서, 어느 정도 내 지갑을 노리는 사람들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곳. 마치 맥도날드에 예약한 사람처럼 당연하게 입장한다.
이집트 음식에 물렸던 터라, 무난하게 아는 맛인 '빅맥'을 주문했다. 인파 속을 헤집고 구석에 딱 하나 남은 자리를 차지했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햄버거를 먹으면서 한숨 돌리니 이제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맥도날드 안에 있는 사람들 때깔이 좋구나. 내 바로 옆자리에는 대가족이 앉았는데, 여성들 의복이 딱 봐도 서민이 아니다. 같은 검은색 히잡이라도 청결도가 다르달까. 피부가 뽀송한 아이엄마는 곱게 화장을 했고, 다섯 살쯤 돼 보이는 딸은 애교가 넘친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인자해 보이신다. 그 가족의 모습과 맥도날드 밖에서 날 피곤하게 했던 호객꾼들의 모습이 비교가 된다.
나의 첫 회사 발령지는 조선회사였다. 조선소에서 사용하는 sw를 운영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그때 처음 알았는데, 같은 사무실에서 같이 일한다고 같은 회사사람이 아니더라. 조선소는 '갑'이었고, 거기와 계약관계에 있는 우리 회사는 '을'이었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우리 회사도 경비절감을 위해 '병'과 계약해서 일한다. 그리고 일이 바쁠 때는 프리랜서까지 단기로 투입하는데 이 사람들은 '정'이라고 하자. 그러면 한 사무실에 갑~정까지 각자의 소속이 다 따로 있다. 같은 일을 하는데 연봉도 다 다르다. 나에게 전산지식을 가르쳐준 '사수'도 우리 회사와 파트너 관계에 있는 분이었다. 소속은 다르고 다른 처우를 받는데도 일은 별 차이가 없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법적으로 원청과 하청의 업무는 분리해야 하지만, 무 자르듯 일을 분리하지 않았다. 관리자를 제외한 실무직들은 소속회사의 구분은 사실은 모호하게 일을 해나갔다.
우리나라 조선업 경기가 침체되면서, 원청인 조선회사는 우리에게 계약축소를 예고했다. 우리 회사는 우선적으로 '병', '정' 소속인 직원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례 1년 주기로 사람들에게 받던 근로계약서를 3개월 간격으로 받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에서는 별 의미 아니라고 했지만 서명을 해야 하는 하청 소속 직원들은 그때부터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조선소의 흥망과 관계없이 나의 고용은 안정적이었다. 우리회사는 다양한 고객처가 있어서, 조선회사와 계약이 끝나면 다른 부서로 이동하면 될 일이었다. 내심 다른 일을 해보고 싶던 터라, 이런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와 일을 같이하고 있던 하청회사 소속 선배의 사정은 달랐다. 이미 나이도 많고, 소속회사도 소기업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잘리면 그대로 퇴직수순이었다. 같은 책상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받는 월급이 달랐고 각자를 지켜주는 우산의 크기도 달랐다. 이 차이는 불경기에 더 크게 느껴졌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차마 입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나마 우리나라 직장인들은 이직할 여지라도 있지, 이집트에서 구걸을 해야만 하는 어린아이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한국과 이집트의 맥도날드 물가를 별 차이가 없었다. 그에 비해 1인당 GDP는 10배 차이가 난다. 이집트 사람들은 맥도날드가 한국인보다 10배나 더 부담스러운 식사인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룩소르 맥도날드 안에서 봤던 사람들은 상당히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맥도날드 안에서 부모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아이와, 문 밖에서 나에게 외면을 당하면서도 열쇠고리를 팔아야 하는 소년은 무엇이 그렇게 인생을 갈랐을까.
살아갈수록 내가 꿈틀대는 데 한계를 느낀다. 한때는 삼라만상의 인과관계를 찾으려고 했다. 성공한 사람은 그만큼 노력해서고, 그 반대의 사람은 게으름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 이를테면 가족 환경이나 타고난 기질은 어쩔 수가 없다. 세상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다. 그러니 자만하지도, 자책하지도 말자. 그저 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 이렇게 생각하면 겸손해진다.